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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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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 미늘 102. 차성이씨 사무총장 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102. 차성이씨 사무총장 되다 이영백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성과 본을 받는다. 아버지의 관심으로 보학에 뛰어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3학년 때 아버지는 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월성이씨 시조 탄강지인 경주시 동천동 광림대로 갔다. 그곳에는 바위가 누운 사람 같았다. 참 신기하였다. 비조(鼻祖)를 알았다. 초교 입학하기 전부터 서당 다녔기에 을미보(1955년) 족보 서문을 읽었다. 그 내용이 얼토당토않았다. 왜 불확실한 자료를 족보에다 싣게 되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신유보(1981년) 수보 때 처음 참여하였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우리 시조조차 올바르게 모르고 살았다. 부끄럽다. 월성이씨 탄강지는 광림대(光臨臺)다, 기원전 117년 한무제 ..
(엽서수필 3) 미늘 101. 논픽션가가 뭐지?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101. 논픽션가가 뭐지? 이영백 매스컴 지상에 어찌하면 “논픽션가”라는 직함으로 사용하는지 무척 궁금하여 기어이 “논픽션가”에 도전하였다. 마침 지방 매일신문사에서 전국으로는 처음으로 논픽션을 2015년에 공모하였다. 제1회 시니어문학상 공모전이다. 단 1회라도 당선이 되면 논픽션가로 인정하니 매력이 있다. 논픽션이라 무엇인가? Non-Fiction? 픽션은 허구다. 접두사 Non이 붙어 허구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픽션은 소설인 허구요, 픽션은 꾸며낸 이야기라 한다. 부정이 붙어서 소설 아닌 것이 “논픽션”이다. 그렇다고 하여 신문지상에 나오는 기사가 사실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건의 풀이에 불과하니 논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오로지 체험을 풀어내어야 할 것 같..
(엽서수필 3) 미늘 100. 나를 수필가라고?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100. 나를 수필가라고? 이영백 지나고 보니 그렇게 수필가(隨筆家)가 되었다. 수필가? 처음에 친구가 원고 뭉치를 들고 와서 교정하여 달라고 하였다. 퇴근시간에 찾아와서 당일치기 250여 면의 글을 모두 교정하여 달라니 약간 힘이 들고 약이 올랐다. 나도 이 정도 글이라면 수필가가 되어 보리라 작심하고 5년간 글을 썼다. 300여 편, 6권의 수필집 초고 원고를 썼다. 그렇게 해서 등단한 것이다. 첫 번째 책에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더듬어 글을 썼다. 첫 권 제목이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이라 정하였다. 어렸을 때 기억 더듬어 무턱대고 기억들이란 것을 모두 소환하여 줄글로 남겼다. 두 번째 책에는 고향 집둘레 나무, 풀을 찾아 1부 꾀양, 감, 아도, 뽕 등..
(엽서수필 3) 미늘 99. 아제의 변명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99. 아제의 변명 이영백 곧잘 변명을 확인하듯 흔히 사용하는 말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한다. 요즘은 “테스 형”이 유행가로 뜬다. 분명 나도 직장을 두 번이나 떠나버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아제의 변명으로 스스로 밝히고자 한다. 턱 빠지게 웃지도 못할 일들로 최초의 직장을 얻었다. 1960년대 말이라도 집안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학비 받아가면서 공부하고 안 되면 입시학원에 다녀서라도 보완하여 S대학교로 입학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이상한 교육철학으로 신학문을 기웃거리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대학까지 고학(苦學)하면서 학창시절을 스스로 돈 벌어 벼랑길 위 걷듯 고생하면서 배워야 하였다. 군대라는 굴레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2개월 대기하였다가 발령 받..
(엽서수필 3) 미늘 98. 부참여 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98. 부참여 되다 이영백 사립 전문대학 교직원이 되어 문교부에 첫 출장을 갔다. 문교부에 출장 간 것은 학장의 “문교”기관지에 원고게재 제출 건이다. 그때는 메일이나 팩스도 없던 시절이다. 요즘 같으면 특급 또는 등기 소포나 메일로 보내겠지만, 그렇지 못한 시절이다. 원고를 수정하고 원고지에 맞춰 써 드린 대가인 위로출장을 보내 준 것이다. 갑자기 명령 내려서 밤기차 타고 “문교부”라는 상위 관청을 찾는 중대한(?) 첫 출장업무이다. 늦은 밤 도착하여 역 부근에 여관을 정하였다. 피곤한 첫 출장에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혹 늦잠 잘까봐 거의 뜬눈으로 밤새웠다. 날이 밝아지면서 세수하고 번잡한 서울거리를 나왔다. 서울은 확실히 서울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도시가 ..
(엽서수필 3) 미늘 97. 전문대학 교직원 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97. 전문대학 교직원 되다 이영백 사람 살면서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그 시절 상황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8년 동안 초교교사로 마치고 나의 앞길을 위하여 과감히 버리고 돌아섰다. 많은 고민의 결과이지만 떠난다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공직자의 몸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었다. 후임을 위하여 5일간 당겨 의원면직을 제출해 준 일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이다. 제자들에게 교사 없이 달포를 허송하지 못하게 한 것이 참 떳떳할 뿐이다. 교장ㆍ교감의 억압한 일은 잊고 떠나자. 1981년 3월 2일 잊지 못하는 날이다. 대학교 편입하고 초등교사직을 버리지 않았다. 업무를 충실히 하고자 경리업무 말고 모든 업무를 잘 할 수 있겠다고 박동×교장에게 말씀드린 것이 독이 되어 돌아왔..
(엽서수필 3) 미늘 96. 무명교사 이로소이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96. 무명교사 이로소이다 이영백 결코 스스로 칭찬받고자 교사가 되지 아니하겠다. 일찍이 외국 시인 헨리 반 다이크(Hanry Van Dyke)가 쓴 “무명교사의 예찬”을 교육대학생일 때부터 읽었다. 대단한 예찬이다. 물론 그것을 쓴 시인에게는 무어라 할 수도 없다. 진정 대한민국 교사로서 무명교사를 탓하고자 함도 아니요, 더욱 칭찬 받고자 함도 아니다. 단지 가르침이 좋아서 교사가 되고, 이 나라 기둥 되라고 독려하려는 작은 욕심으로 교사 직업으로 출발한 것이다. 고사리 같은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는 공책 위의 글씨는 삐뚤빼뚤하여도 그것이 과히 예술이다. 최초로 맡은 50명 학급의 담임으로서 그들에게 교과서뿐만 아니고, 현대문명을 가르치고 ..
(엽서수필 3) 미늘 95. 2급으로 연구주임교사 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95. 2급으로 연구주임교사 되다 이영백 초등학교 교사의 직업적 매력은 앵무새 강의가 아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같이 삶을 사는 즐거움이다. 여유 있고 삶을 즐기려는 생각이었다면 초교 교사야말로 무명교사로서 가장 봉사하는 거룩한 직업이다. 대한민국 초등교육에 봉사할 기회를 받은 사람이니 매일 즐거웠다. 최초 4학년 50명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100개마다 배우려는 학생들로 인하여 즐거웠다. 교문에서 바다가 10여 미터 거리로 두고 풍금소리내면서 파도소리를 반주삼아 바다보이는 교실이다. 오로지 내가 맡은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 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4,5,6학년 3년간 데리고 제9회로 졸업시켰다. 두 번째 학교에서 현장연구 논문연구제출로 푸른 기장증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