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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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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 미늘 86. 다시 영못 찾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6. 다시 영못 찾다 이영백 가만히 추억을 더듬는다. 아사달ㆍ아사녀 전설이 있는 “영못”이 생각난다. 일요일 그 못으로 찾아갔다. 부모님 선산 앞을 지나 경주-울산사이 17번국도(현 산업로)에서 불국사역, 원(原)고개 지나자말자 갑자기 왼쪽 직각으로 꺾어 철길타고 넘어 영지암(影池庵) 찾아 들었다. 영지암 지나 못 둑길에 미끄러지듯 조용한 영못 밀개까지 가서 차를 세웠다. 아사달이 부인 찾아 헤매던 못 둑이다. 걷기 좋게 길이 잘 꾸며져 있고, 사람들이 제법 찾아 다행이다. 토함산을 배경으로 사진 찍었다. “불국사 고금창기”에 기록이 남아있다. “아사달은 이름 없는 당나라 석공이고, 아사녀는 그의 누이동생으로 내용은 전설과 비슷하다. 누이가 오빠를 찾아왔는데 탑..
(엽서수필 3) 미늘 85. 다시 못 이야기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5. 다시 못 이야기 이영백 어렸을 때 못은 두려움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지만 얼음 녹으면서 숨구멍으로 통하여 몰아 오르는 공기팽창이 밤이면 얼음 깨어지는 소리로 들린다. 상상도 못할 대 괴성으로 “꾸~르릉~ 꾸웅~ 우~~웅~”긴 여음으로 들리었다. 매끄럽던 얼음판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슬픈 소리는 짧은 봄밤 무서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얼음 깨지면서 봄이 기지개켠다. 1960년대 말 농촌은 문화시설이 없었다. 들판의 초가삼간을 지키는 엄마는 문화가 고팠다. 세 번째 좋은 우물이 있던 집 대문에 마주한 김해(金海)댁은 시동생이 일본 유학하여 많은 돈 벌어 고향에 땅 샀다. 일찍 개명한 집안이라 불국사기차역 앞에 여관 겸 가게도 마련하였다. 김해댁에 ..
(엽서수필 3) 미늘 84. 우물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4. 우물 이영백 태초부터 사람이 마시는 물은 어디에서 얻었든가? 아마도 처음에는 흘러가는 물에 그냥 퍼마셨을 것이다. 흐르는 물은 오염되거나 안전하지 못한 것 알고부터는 땅 파고 새어나오는 것으로 음용하였을 것이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약수터의 물을 사람들이 마셔도 좋은지에 대한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시골 우물 하나 파기가 매우 힘들었다. 어디에다 파야 안전한 물 얻을 것일까라고 고심하였다. 우물 파려고 작정하였으면 나름대로 땅을 파야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위에서부터 돌 괴어 내려 가야할 것이다. 세 번째 살았던 집 대문 앞에는 바로 깊고 물맛 좋은 공동우물이 있어서 물 귀한 줄 모르고 펑펑 사용하였다. 동네이야기가 꽃 피우는..
(엽서수필 3) 미늘 83. 감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3. 감 이영백 시골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감나무에 달리던 감이다. 감은 “조율이시(棗栗梨柿)”로 끝에 있다. 감은 삼색과실의 하나로서 제찬(祭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감은 일용할 양식이다. 홍시는 소 먹이러 갈 때나 어중간하게 배고플 때 딱 반 갈라놓고 섬유질 먹는 재미가 좋다. 감나무는 처음부터 감나무가 아니다. 고욤나무를 키우다가 감나무 가지를 잘라 와서 접붙이기로 키운다. 밭둑이나 관리상 편리하라고 집 울타리 안에다 심는다. 연한 녹색의 새잎이 뾰족하게 감나무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봄이 온다. 점점 푸르게 짙어가는 잎들이 아가 손같이 정겹다. 새벽에 일어나면 사립문 여는 곳부터 노란 감꽃은 소복이 내려앉아 있어서 저절로 양푼에 주워 모은..
(엽서수필 3) 미늘 82. 마지막 살았던 집 앞에서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2. 마지막 살았던 집 앞에서 이영백 마지막 살았던 집에는 유별난 애착이 남아 있던 곳이다. 일곱 살에 인지가 더욱 발달할 때쯤 옮긴 네 번째 집을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 그곳에서는 비록 어렸지만 집 짓는데 직접 동원되었고, 터 파기부터 주춧돌 하나하나까지 놓이는 것도 보았다. 그 집에 대한 느낌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은 학동기 겪으면서 배움의 몸부림을 한 터였기에 더욱 그렇다. 소 열한 마리 키우던 일, 닭 열 마리에 종종거리며 삐~약 거리며 따라 다니던 병아리 떼들, 개는 세 마리나 되고 밤낮 충견으로 집 잘 지키기를 철저히 하였던 곳이다. 사랑채에서 대통으로 화로 전에다 두들기며 명령 내리던 아버지 음성이 고스란히 지금도 들리듯 하다. 괴팍한 아버..
(엽서수필 3) 미늘 81. 고향 찾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1. 고향 찾다 이영백 여우도 죽으면서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고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한다. 하물며 사람이니까 더욱 다시 고향을 찾고 만다. 그렇게 직장 얻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요, 직장 따라 고향을 맴돌며 살았다. 그렇다고 부모님 유택 두고 훌쩍 외국으로 떠난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고향이라는 말에 저절로 향수를 느끼고, 그것 때문에 센티멘털해진다. 고향은 낳아 주신 부모님의 무덤이 거기에 있고, 어릴 때부터 살았고,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들이 주저리주저리 전설처럼 달려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삶의 고단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농촌이라는 곳에서 어쭙잖고 보잘것없이 삶을 이어 온 곳이다. 세 살부터 가축ㆍ가금을 돌보는 어린 머슴이었다. ..
(엽서수필 3) 미늘 80. 나의 살던 고향집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80. 나의 살던 고향집 이영백 내가 태어난 곳은 아버지 신혼집이었던 할머니 집 앞집이었다. 동해남부선 기찻길이 있는 철둑 밑으로 기차가 부산으로 가는 신호대가 있는 곳이다. 기차 오려면 신호 내리는 철커덕~ 하는 소리가 집에서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또 가장 찾기 쉬운 방법은 내동면 시래리 동사무소 앞집이다. 세 살 때 기억으로 우리 집 뒷문을 열면 큰집 종형 집이 보였다. 열 번째 막내이기에 할머니 얼굴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더욱 모른다. 아버지 장가들기 전 열아홉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오랫동안 매일 들었기에 알고 있다. 아버지 목수일 하였다. 반 농, 반 목수 집안으로 누가 집이 필요하면 준비하여 척척 지어서 살림 내어 주었다. 우리 집에 모두 연장 빌리러 왔..
(엽서수필 3) 미늘 79. 의원면직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79. 의원면직하다 이영백 직장생활하면서 쉽게 내 뱉는 말로 곧잘 “사표(辭表)낸다”하고 산다. 사표는 ‘직책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적은 문서’니 결국 그 직업을 떠나겠다는 뜻이다. 교육대학 졸업하고 총각선생으로 바닷가에 발령받아 젊음으로 온통 대한민국의 교육을 혼자 다 떠맡은 듯 열심히 가르쳤다. 첫 학교 2년 10개월, 두 번째 2년, 세 번째 1년, 네 번째 2년, 다섯 번째 1개월 25일 만에 그 사표라는 것을 썼다. 그전에도 5년 복무기간을 마치고 첫날인 1978년 4월 30일자로 사표라는 것을 썼는데 제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섯 번째 학교에서 사표는 정식으로 제출하고 말았다. 네 번째 학교에서 대학교 편입시험을 치르고 대구 쪽에 가까운 곳으로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