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엽서수필 3/미늘

(엽서수필 3) 미늘 97. 전문대학 교직원 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97. 전문대학 교직원 되다

이영백

 

 사람 살면서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그 시절 상황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8년 동안 초교교사로 마치고 나의 앞길을 위하여 과감히 버리고 돌아섰다. 많은 고민의 결과이지만 떠난다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공직자의 몸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었다. 후임을 위하여 5일간 당겨 의원면직을 제출해 준 일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이다. 제자들에게 교사 없이 달포를 허송하지 못하게 한 것이 참 떳떳할 뿐이다. 교장ㆍ교감의 억압한 일은 잊고 떠나자.

 1981년 3월 2일 잊지 못하는 날이다. 대학교 편입하고 초등교사직을 버리지 않았다. 업무를 충실히 하고자 경리업무 말고 모든 업무를 잘 할 수 있겠다고 박동×교장에게 말씀드린 것이 독이 되어 돌아왔다. 사무분장 발표를 정기×교감이 발표하면서 경리와 다른 업무 모두를 포함하여 발표하였다. 한 번 발표한 것은 번복 못한다고 하였다. 업무 인수인계가 시작되었고 학교생활이 어려우면 사표내고 떠나가라고 한 것이다.

 두 시간 수업 후 중간놀이다. 과학업무 맡으니 내가 방송 틀어놓고 체육업무 맡았으니 조례 단에 올라가 내가 체조준비 하고, 내려 와서 교무실에 들러 체조 SP판을 얹고 쫓아 나와 체조한다. 체조 끝나고 다시 내려가 행진곡을 얹고 학생들을 교실로 들어가게 하였다. 완전히 장구치고 북치고 혼자 다 하였다. 다른 업무도 그랬다. 이 행위를 다른 선생님이 지켜본다.

 17일이 되면 경리업무 맡았으니 수업은 자습시키고 농협 들러 국고 찾아왔다. 월급봉투 만들고 현금을 잔돈까지 헤아려 넣고 봉급을 나누어드려야 하였다. 봉급날에는 그렇게 돈과 씨름하다 학생공부 가르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생활 패턴을 1981년 4월 25일까지 계속하였다. 그리고 멈췄다.

 이직을 생각한 것은 늦었지만 초등학교에서 긍정적 복무를 할 수가 없었다고 느꼈다. 모 전문대학에서 일반직 모집한다는 광고보고 원서를 제출하였다. 2명 모집에 134명이 모여 1차~3차 시험을 치렀다. 1차 5명으로 압축되어서 합격되었고, 2차 150문항 한자쓰기 문제에도 합격, 3차 최종면접으로 결정되어 받은 전보쪽지를 들고 내자가 시골로 찾아온 날에 던졌다.

 1981년 5월 1일부터 도회지 대학 교무과 행정 7급으로 출근하였다. 시골 초등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었다. 그렇게 대학행정의 달인이 되어갔다.

(20210807.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