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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미늘

(엽서수필 3) 미늘 102. 차성이씨 사무총장 되다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102. 차성이씨 사무총장 되다

이영백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성과 본을 받는다. 아버지의 관심으로 보학에 뛰어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3학년 때 아버지는 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월성이씨 시조 탄강지인 경주시 동천동 광림대로 갔다. 그곳에는 바위가 누운 사람 같았다. 참 신기하였다. 비조(鼻祖)를 알았다.

 초교 입학하기 전부터 서당 다녔기에 을미보(1955년) 족보 서문을 읽었다. 그 내용이 얼토당토않았다. 왜 불확실한 자료를 족보에다 싣게 되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신유보(1981년) 수보 때 처음 참여하였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우리 시조조차 올바르게 모르고 살았다. 부끄럽다.

 월성이씨 탄강지는 광림대(光臨臺)다,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元狩) 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 밝 바위(瓢巖峰)로 내려 왔다고 한다. 수명은 이백세 장수하였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에 이씨로 사성 받았다. 월성에서 분적 하였기에 시조는 이위(李渭)다. 우린 신라 차성이씨 후손이다.

 대학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우리 시조를 찾았다. 1983년 6월 6일 경주 죽림장에서 대종회를 직접 창립하였다. 대종회 조직부장을 스스로 맡아 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지부도 여러 곳에 창립하였다. 1985년 인구센서스 통계에서 “차성ㆍ기장”본관의 인구수가 고작 1,577명이다. 2,000년에 2,173명이요, 2015년에 2,391명이 그 현황이다. 참 수가 너무 적다.

 5대파(부사, 판관, 호군, 교리, 정랑)가 화합되지 못하자 1991년 1월 20일에 호군공파종회를 창립하였다. 「호군종보」를 9호까지 발간하여 족보발간을 1993년 3월에 결정하였다. 이 또한 화합되지 못하여 현재에 이른다. 씨족을 연구하였으나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여 오기에 대종회 제2차 정기총회에서 대종회 사무총장을 받았다. 너무 힘겹다.

 차성은 초교교사를 발령받아 도서업무 중에 책장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 3권을 떨어뜨려 책 388페이지가 펼쳐졌다. 그곳에 기장현 군명으로 “갑화양곡(甲火良谷)현ㆍ차성(車城)”을 발견하였다. 그 후로 기장읍지를 구하고 지명과 관련하여 본관 사료를 찾았다. 부사공파(1920)향보와 정랑공파(嘉慶 拾폐(木+別)年, 1873)향보를 구하였다. 교리공파 현대본도 구하였다.

 그렇게 차성이씨 중앙대종회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 직에 힘겹다.

(20210815. 일. 광복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