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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미늘

(엽서수필 3) 미늘 103. 뿌리를 찾아서

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103. 뿌리를 찾아서

이영백

 

 일찍 차성이씨 뿌리를 찾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관심이 더해진 것 같다. 너무 어려서 뿌리가 귀한 줄도 몰랐다. 초교 3년께 사랑채에 오는 집안 아저씨로부터 족보를 펴놓고 있기에 아는 글자 몇 자씩 읽어댔다. 나이 묻고서 칭찬하여 주었다. 아마 어려서도 그 칭찬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 족보는 1955년 乙未譜 석판본 족보였다.

 족보의 서문부터 아는 글자만 읽어도 어렴풋이 뜻이 통하였다. 어려운 글자는 자전 찾아보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버지는 수단하러 울릉도로, 포항 청하, 부산 미남, 경주, 월성 등 두루 다니면서 수단지를 받아 왔고, 벼를 가마니 채 싣고 가서 “차성이씨 용강재(龍岡齋)”를 지었다.

 젊어서는 뿌리의 필요성을 잘 몰랐다. 결혼하고 만성보(萬姓譜)를 펴놓고 본관을 찾아보라 하여 진땀이 났다. 찾아도 없었다. 주변사람에게 물어도 몰랐다. 뿌리가 없는 자손이면 심각할 것이다. 어깨가 무거워져 왔다. 겨우 「전고대방(典故大方, 姜斅錫)」 속에 본관이 기장으로 나와 있었다.

 초교 교사직을 던지고 대학에 근무하면서 「기장읍지」도 보았다. 월성에서 분적 하여서 서울로 출장 다니면서 찾았다. 월이 「표암지(瓢巖誌)」에 글도 쓰고, 여러 자료를 축적하였다. 1983년에 대종회를 창립하고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분적 합천 이씨에 나온 분적자료 등도 찾아보았다.

 차성은 삼한시대 “갑화양곡(甲火良谷)”이라 부르다가 현으로 승격하였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 현대지명화로 기장이라 개칭하면서 일명(一名) “차성(車城)”이라 불렀다. 고려 8대 현종 9년(1,018)에 별호(別號) 차성이라 하였다. 1995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편입되다.

 월이(月李) 筆寫本, 정랑공파癸酉譜(1813), 부사공파庚申譜(1920), 乙未譜(1955), 辛酉譜(1981), 교리공파癸亥譜(1983) 등 차성이씨 사료로 찾다.

 이후 “車城李氏의 淵源”을 쓰고, “車城地名考”, “車城歌연구”, “鼻祖(李氏諱謁平)에 관한 一 考察”, “車城李氏 始祖(諱渭) 補正考” 등 졸고와, “車城李氏 行列字 統一(1991)” 등을 발표하였다.

 21세기를 맞아 족보타령이냐고 핀잔을 한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 본관 연원, 시조, 파, 항렬자라도 알아야 후손에게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다.

(20210817.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