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2872)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0. 학위논문 쓰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0. 학위논문 쓰다 이영백 어쩌다 대학(교)을 세 곳이나 다녔다. 대학원에는 학위논문을 제출한다. 아예 원에서는 입학할 때 학습계획으로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 특히 전문대학원은 2년 6개월이라 한 학기가 더 있다. 그 학기에 논문을 쓴다. 대학행정 업무라는 것이 늘 바빠서 논문 쓸 시간 확보를 하지 못하였다. 지도교수와 대면하기도 어려웠다. 논문지도를 대면으로 10회까지 지도 받아 제출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제부터 한 번도 지도 받지 못하고, 한 학기가 그냥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일과 공부의 두 마리 토끼잡기가 어려웠다. 한 학기는 재깍 지나가버렸고, 지도교수를 바꾸려고 하니까 또한 쉽지 아니하였다. 처음 주제는 “가사(歌辭)”를 주제로 논문 쓰려고 하였..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9. 교육 현장논문 쓰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9. 교육 현장논문 쓰다 이영백 1972년 교육대학 2학년 때 한국교육의 이념, 목적, 내용, 방법 등에 관한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곳인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설립되었다. 국내ㆍ외 교육관련 연구논문을 발간하는 곳이다. 관련분야 관심 있는 사람이 주소만 알려주면 달마다 20여 편의 논문을 우편료까지 부담하여 보내 주었다.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현장 연구결과물이다. 교사발령 받고 주소변경 하니 논문을 계속 보내주었다. 덕택으로 교육이론을 상당히 습득하였다. 교사로 발령받고부터 부가점수가 되는 상장과 표창장을 알았다. 표창장은 경력이 15년 넘는 주임교사 급에게 교장의 허락으로 표창장 내신을 내어 교육청에서 정해져야 받게 된다. 방금 잉크도 안 마른 초..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8. 잊어버린 강, 신라 형산강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8. 잊어버린 강, 신라 형산강 이영백 그렇게 강을 떠났다. 앉은뱅이밀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떠났다. 도회지로 떠났다. 언제나 떠나지못할이라고 생각하였다. 강을 잊어버리려고 하였다. 머릿속 한 부분에서 앓고 있던 것, 조금은 짧은 자토라기 시간에서라도 생각에서 해제되고 싶었기 문이었다. 나는 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강을 떠나면 죽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사람이 참 쉽고도 얄미운 것이다. 어느새 강을 떠나도 내가 살 수 있다는 만용이 현실화 되었다. 진정 강을 떠나 살 수 있는지 자문자답도 하였다. 이미 머릿속에 오래 깃든 강을 잊어버리려고 하여도 그게 그리 쉽지 않다. 형, 누나, 조카, 질녀, 생질, 생질녀, 당질, 당질녀 등 얽히고설킨 것이..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7. 딱실못을 나와서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7. 딱실못을 나와서 이영백 형산강에 살면서 무엇이라도 배운다. 배움에 갈망하였다.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니 예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문교부지정 농촌형 자활급식시범학교”에 연구주임교사하면서 갑자기 P대통령의 서거로 인하여 수행하던 프로젝트를 그만 버렸다. 개인발전을 고민하였다. 더 공부하려면, 방송통신대학교(에서 5년제로 변경)를 진학하여야 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1981학년도 4년제 대학교 마지막 편입연도에 사범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합격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현직을 떠나지 못해 인사이동 신청하여 하강초교에 발령이 났다. 하곡리와 강교리 두 동네의 두문자를 따서 “하강초교”라 하였다. 학교 가까이 딱실못〔霞谷池..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제9부 강과 공부 76. 강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제9부 강과 공부 76. 강을 떠나지 못 하는 이유 이영백 지나고 보니 나도 범시민에 끼이고 말았다. 태어나고, 자라고, 걱정을 해 주던 부모님 밑에서 공부하고, 성장하여 훌쩍 어느 날 부모님 곁을 떠났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자기 분신인 자식 낳아 기른다. 그렇게 새로운 세대가 생겨 한 개체로서 나도 평범하게 살아간다. 강의 일생이나 사람의 일생은 너무나 흡사하다. 강의 유년기처럼 산골짜기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의 유년기로 산다. 그것이 어찌 지나온 나의 어린 날과 흡사하다. 저녁 일곱 시에 등불 끄면 담요로 문 가린 토방에서 밤새도록 공부하였다. 그렇게 강과 공부하였다. 천천히 강을 닮아 간다. 강도 청년기 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산골..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5. 포항 물회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5. 포항 물회 이영백 1973년 초짜 선생을 할 때다. 그날도 교감선생님과 함께 포항나들이를 하였다. 오후 늦은 시간 포항 시내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오거리 죽도시장을 지나치는데 교감은 제안하였다. “이 선생 포항 물회 먹어 봤어요?” “아뇨.” “그러면 잘 되었네. 오늘은 이 선생이 쏘세요.” “아. 예. 교감선생님!”순간에 거절도 못하고, 재빠른 대답을 하고 말았다. 교감선생님은 초짜교사인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육거리 소재 교육청에 들러 공문을 찾고, 물회 먹으러 갔다. 아마도 육거리와 오거리 사이 상원동 도로변으로 기억이 난다. 식당은 한옥이었고, 조금 누추하였지만 유명한 “포항 물회”식당이라 하였다. 1973년 물회에 대해 아무..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4. 포항종합제철소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4. 포항종합제철소 이영백 포항종합제철소에서는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화입 후 21시간 후에 용광로에서 쇳물이 터져 나왔다. 제철보국으로 영일만신화를 만들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1973년 신임교사연수”에 참가하였다. 오전에는 행정연수로 회의실에서 강의 들었다. 오후에는 버스가 도착하였다. 국책산업시설인 포항종합제철소를 방문한다고 하였다. 버스로 출발하였다. 제철소 출입문이 여럿인데 오른편으로 꺾어 상황실에 갔다. 모형도를 앞에 두고 주요연혁으로 설명하였다. 상황실을 내려와 버스에 올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관계자 한 분이 버스에 올라서 “안녕하십니까? 이 고장에서 선생님하시는 여러분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3. 형산강과 시골이사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3. 형산강과 시골이사 이영백 형산강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강을 조금 비켜나서 열심히 사느라 분주하였다. 적은 봉급이지만 젊으니까 그렇게라도 그 봉급으로 소금물 여과한 것처럼 짠 생활로 살았다. 사는 집은 늘 남의 집이다. 교사는 언제라도 16절지 공문서 한 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이사 가야 한다. 신접살이 집은 우리 반 학부형 집이다. 새로 지은 두 칸짜리 집이다. 부엌에는 새카만 연탄 일백 장을 소복이 쟁여 둔 것이 배부르게 밥 먹는 것보다 좋았다. 큰방은 신혼 방이고, 작은 방은 서재다. 문학관련 서적을 할부로 사들여 진열하였다. 바람이 불어 문이 쾅 닫히어도 집주인에게 미안하였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산다는 것이 늘 좌불안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