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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4. 삼천기(三川岐)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4. 삼천기(三川岐) 이영백 경주에 “삼천기(三川岐)”를 아시나요? 삼천기이란 한자어로 세 지천이 모이는 분기점이다. 여태껏 잘 몰랐는데 “인천”거랑을 아느냐고 페이스북(Facebook) 글보고 관심 가졌다. 인천(麟川)은 “기린천(麒麟川)”의 줄인 말이다. 신라의 최초 절인 남천 흥륜사 터가 삼천기 가까이라 하였다. 삼천기는 어디를 말하는가? 기린천(인천)과 모량천(대천), 서천 등 세 거랑이 만나는 지점이다. “서천”은 경주 서쪽의 거랑이고, 울산 쪽에서 포항으로 냅다 가로지르는 듯한 지천이 “기린천”이다. 형산강 발원지가 있는 서북쪽으로 난 지천이 “모량천(대천)”이다. 남천(문천)과 서천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늘 그곳이 궁금했다. 남천의 끝 지점..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3. 신라 박이차돈(염촉)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3. 신라 박이차돈(염촉) 이영백 박이차돈은 23대 법흥왕 때 사람으로 조부는 갈문왕의 아들로 왕족이다. 마음이 정직하고, 충심이 놀라우며, 지혜는 거울과 같았다. 적선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죽백(竹栢)같은 마음으로 충신이 되려고 늘 힘써 왔다. 22살에 “사인(舍人)”이라는 나직한 벼슬에 올라 신라 23대 법흥왕의 눈에 들었다. 왕은 불교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왕이 머리 깎고, 가사 두르고 다니면 백성들을 그르치는 사교(邪敎)라고 신하들이 모두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왕은 늘 주위에 못 이겨 마음속이 불안하였다. 이차돈이 엎디었다. “옛날사람은 초부(樵夫)에게도 지혜를 물었다 하오니 소신에게 폐하의 마음에 두고 있는 바를 알려 주십시오!”..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2. 남천과 흥륜사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2. 남천과 흥륜사 이영백 남천 가 오릉 건너편 “흥륜사지(興輪寺址)”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한다. 신라는 귀족사회 국가이다. 늘 힘없는 왕권(화백제도 실시로 단 한 명이 반대해도 무산되는 운영방법)은 휘둘리고, 왕권은 유명무실하다. 국가운영에 맹점이 되기도 한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 신라 13대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허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폐허가 되었다. 오랜 후에 23대 법흥왕 14년(527)에 박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대왕 5년(544)에 완성하였다..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1. 남천과 도당산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1. 남천과 도당산 이영백 곧잘 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 경주IC를 지나 고향 가려고 빠른 도당산 터널을 지난다. 1968년 고교 다닐 때 관 데모에 여러 곳으로 나갔다. 그 중에 도당산 가로지르는 경주IC-보문간 서라벌대로를 P대통령은 계획한 것이다. 사실은 포항공업도시에 경부고속도로를 연결하려는 의도이었다. 경주가 행주형(行舟形)이라, 배가 나아가는 형상이다. 도당산(都堂山)은 시내에서 본다면 돛대다. 그 돛대가 있는 곳이 자라의 목에 해당하였다. 신라 궁에서 살다 죽으면 월정교를 지나 도당산으로 통하여 신선이 된다. 하필 경주박씨 선산인 그곳 도당산 윗부분을 잘라 서라벌대로로 만들려고 하니 반대가 닥쳐왔다. 100m도 안 되는 낮은 구릉이지만 경박 선산..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0. 남천과 요석공주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0. 남천과 요석공주 이영백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믿은 것이 깊이 찾아보면 모호하거나 쉽게 “설화(說話)”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신라 설화 중에 그런 일이 많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모호하게 답한다. 현실에서 보면 아무도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다. 남천의 “월정교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유교(楡橋, 느릅나무 다리)”라고 한다. 신라 태종무열왕은 딸이 시집갔다 과부되어 돌아왔다. 원효는 저잣거리를 떠돌면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 기필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베어올 것”이라 노래하고 다녔다. 왕은 자루 없는 도끼가 과부요, 하늘 떠받칠 기둥은 현인을 뜻한다는 것으로 알고, 요석공주와 맺어주려고 하였..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제7부 강의 미학2 59. 남천의 월정교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제7부 강의 미학 2 59. 남천의 월정교 이영백 신라의 수도에는 세 곳에 강이 흐른다. 남천, 서천, 북천(알천)이다. 그 중에 남천에서는 궁궐에서 신선으로 오르는 “왕의 길”이 연결된다. 다리위에다 집을 지은 누교(樓橋)인 월정교(月淨橋, 月精橋)가 있다. 월정교는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500여년 다리기능을 수행하였다. 그 이름도 처음에는 “월정(月淨)”이라 하였으나, 근세조선에 와서 “월정(月精)”으로 바뀌어 현재에 복원되었다. 고려 문인 김극기 시에 “반월성 남쪽 토끼고개 옆에, 무지개다리 그림자 문천에 거꾸로 비치네(半月城南兔嶺邊 虹橋倒影照蚊川)”라는 구절로 월정교를 두고 읊은 것이다. 신라의 남천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는 월정교(月精橋..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8. 서천과 젊은 날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8. 서천과 젊은 날 이영백 강(江)은 한자어다. 고유어로는 “가람”이다. 고유어는 한자어에 밀려나서 잊혀져가고 있을 뿐이다. 강은 산과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 땅을 “삼천리금수강산”이라 한다. 나는 강과 산 중에 강을 좋아한다. 그냥 무던히 제 할일만 하는 강이 그냥 좋기 때문이다. 누가 무어래도 밤이나 낮이나 흐른다. 간혹 태풍이라도 와서 물이 불으면 성난 노도와 같다. 강은 흐르는 것이 속성이다. 마치 젊은 날 곗돈 부어 몫 돈을 만들 듯이 자기 아이덴티티(identity)를 결코 잊지 아니한다. 강은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강은 살아 있다. 죽은 강은 늪이다. 물이 정체하면 썩는다. 그러나 강은 계속 흐른다. 일천 년 전, 이천 년 전에도 흐르..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7. 서천을 바라보며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7. 서천을 바라보며 이영백 경주 서천을 한꺼번에 요만큼 많이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석장동 암벽화 위 금장대(金藏臺) 위이다. 북천(알천)이 직선으로 내리 쏟아지고, 지척에서 서천이 길게 펼쳐져 있다. 동대교, 장군교, 서천교 등이 사람이나 자동차가 건너다니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천을 바라본다. 서천은 무너미 땅에다 신라 금입택만치 호화롭게 치장하였다. 외지인들이 보면서 이렇게 좋은 산책로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강변 둑을 따라 걸으면 너무 좋다. 우레탄으로 바닥을 깔았다. 사이에 잔디, 또 자전거 등 바퀴달린 탈것 등은 소도로, 동쪽 도로 밑으로는 그림처럼 그린으로 펼쳐진 유소년 축구장으로 정리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걷기에 천국이다.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