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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8. 신월성의 달빛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8. 신월성의 달빛 이영백 고향이었으면서도 깊이 헤아리지 못함에 부끄럽다. 흔히 고향이라고 “신월성”을 “반월성”으로만 부르고 살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신라 사람들은 저네들 살던 곳을 자랑 삼으려고 왕성 있던 곳이 초승달 닮았다고 “신월성(新月城)”이라 하였다.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반달모양이라고 해서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렀다. 왜 이러한 사단이 났는가? 고유어 “초승달”을 한자어로 신월성이라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무슨 역사를 배웠던가? 참 부끄럽다. 일상 앵무새 소리만 인식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경주가 고향이라고 자랑하다가 말을 잃었다. 신라시대 신월성에 “석빙고”가 있다고 자랑을 냅다하다가 막상 석빙고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엄..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7. 신라달빛에 묻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7. 신라달빛에 묻다 이영백 누가 화두로 묻는다. “그대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물론 돌아가고 싶지만, 얼룩졌던 나의 청춘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아니하오.” 그렇게 당당히 거절하였다. 누구는 그렇게 청춘으로 돌아가면 너무 좋겠다고 하였다. 이제 그것을 신라의 달빛에 물어본다. 달빛은 오랜 세월 산전수전 겪었으니 무엇인들 답변하지 못할까? 정말 달빛은 신의 존재다. 특히 신라의 달빛, 경주의 달빛으로 존재해 오던 것으로는 모든 대중들의 물음에 답해 줄 것 같다. 부디 달빛이여 답을 주소서! 누가 그랬다. 어떤 곳의 단체장으로 출마하고 싶어 했다. 토함산 산꼭대기로 새벽길 올랐다. 새벽 이지러진 달이 마지막 고개를 넘지 않으려고 기다리고 있..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6. 신라의 달빛, 경주의 달빛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6. 신라의 달빛, 경주의 달빛 이영백 신라달밤의 달빛은 다르다. 신월성 옛터에 밤 피리소리나면 울컥 향수에 젖고 만다. 하물며 그 소리에 풀벌레도 합창한다. 신라의 달빛을 느끼려면 경주로 오시오! 신라의 달빛이 곧 경주달빛이니까. 함께 소곤거리는 신라 야사(野史) 들으며 하늘의 별 개수를 헤아린다. 월정교 딛고 건너면 죽어 신이 사는 곳인 남산 오르는 “왕의 길”이다. 그곳 경주 달빛도 좋다. 태어난 곳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신호대 마을, 시래리 동사마을 330번지다. 그곳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으로 내가 열 번째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오로지 하늘의 달빛이 비춰 주던 그런 시절에 살았다. 밤하늘 은하수 별들이..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제10부 강과 달빛 85. 신라와 형산강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제10부 강과 달빛 85. 신라와 형산강 이영백 “어디 사능교?” “경주 산다 아잉교!” 하하하…. 나도 모르게 곱씹어 보아도 경주사투리가 좋다. 세계에 딱 두 나라 밖에 없는 일천 년 전후의 국가로 존재한 나의 안태고향인 신라 수도가 있다. 신라 사람들은 순부더니 하고, 마음이 너무 찐하다. 그래서 정이 많다. 그것은 신라를 오래 존재하게 한 형산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은 흐르고 싶은 대로 흘러서 강이 된 것이다. 억지로 막는다고 그대로 있지 못하여 홍수를 일으키면 제 가고 싶은 곳으로 흐르고 만다. 그것도 예의를 가장 잘 표현하듯 가장 허리 굽힌 낮은 곳으로 흘러가기에 강이 된 것이다. 바로 신라의 형산강이다. 삼한시대부터 사로(斯盧)국은 72소국 중..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4. 뒤돌아 본 공부 인생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4. 뒤돌아 본 공부 인생 이영백 인생에서 출생, 유아기, 어린이, 사춘기,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노년, 사망 단계가 있다. 이러한 여러 단계에서 스스로 찾아 온 사춘기 이후 인생을 돌아본다. 출생이나, 유아기, 어린이로서는 너무나 일반적 공식이다. 사춘기 이후 공부 인생은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회억(回憶)한다. 사춘기는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것이다.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했기에 너무 바빠 그런 낭만을 즐길 만큼 좋은 사춘기시절은 나에게 없었다. 그러나 짝사랑에 빠져보았다. 그러나 사춘기시절을 즐길 만큼 사치하지 못하여서 그예 스스로 짝사랑도 포기하고 말았던 기억뿐이다. 공부에 빠져 청소년이 후딱 뒷걸음질하여 버렸고, 청년기에 접어들자..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3. 대학입학예비고사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3. 대학입학예비고사 이영백 “아버지 하지 말라”는 공부이지만 의지를 꺾지 못하였다. 1970년 12월에 1971학년도 제3회 대학입학예비고사 치르려 경주역에서 대구까지 기차를 탔다. 그때는 예비고사를 치러야 대학(교)에 본고사칠 자격을 얻었다. 예비고사제도란 1969년부터 초급 대학ㆍ4년제 대학교과 2ㆍ5년제 전문학교가 있던 시절이다. 대학(교)을 가려면 예비고사에 합격하여야 한다. 물론 전문학교는 예비고사를 치를 필요가 없다. 예비고사제도는 대학 모집정원의 150%만 합격증을 발부해 준다. 저절로 대학진학예정자 수를 추려버리는 제도이다. 예비고사에 떨어지면 전문학교는 갈 수 있다. 인문계고등학교 졸업반에 오르면 예비고사 준비를 부지런히 하여야 한다. ..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2. 경주고속버스터미널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2. 경주고속버스터미널 이영백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은 1972년부터 영업하였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가는 길에 있다. 예전에 바쁠 때는 시외버스 배차시간이 짧아 시외버스정류장을 이용 하고, 시간이 느긋하면 고속버스터미널을 이용하였다. 참 아이러니하다. 바쁘면 시외버스터미널, 느긋하면 고속버스터미널이 맞는가? 경주고속버스터미널하면 나에게 생각나게 하는 것이 결혼관계로 2층 커피숍이다. 1974년 2월 9일 토요일 불국사 장날이다. 중매쟁이는 경주여상 K교장선생님이다. 영일군에 교사할 때 토요일 오후에 우리 집으로 찾아온다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이 부리나케 준비하여도 무척 바빠졌다. 그때 농촌의 환경은 말이 아니다. 어머니가 계신 큰형님 집으로 예비 장모와 처자가 ..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81.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81.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이영백 1973년 이전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현재 자리가 아니다. 고교 다닐 때 경주역에서 기차를 내린다. 그러나 시내버스를 타면 구경주역과 황오시장 쪽으로 나가는 사이에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 경주시청 홍보실장을 맡아 보던 삼종형이 퇴직하고, ××관광호텔에 근무하다 붕괴되었다. 후에 (주)경주개발 회사에 상무로 근무하면서 경주시외버스터미널을 지었다. 현재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는 주변이 개발되고 어울려 있지만, 1972년까지는 허허벌판이다. 그곳에 터미널을 세웠다고 시민들로부터 욕먹었다. 사람들이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면서 타박하기를 그리 좋아하였다. 시외버스터미널은 경주시 시내버스운행 일부를 담당했던 “한일교통”이 소유주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