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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6. 서천에 멱 감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6. 서천에 멱 감다 이영백 불국사지역에 살았으면서도 서천 거랑에서 목욕한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무녀도”배경인 애기청소(涯妓淸沼)였다. 1년차 병영교육(1971년 8월 4일)을 충북 37사단에서 3주간 받으러갔다. 그곳에서 “학생대대 행정반장”인 현역 정병원 병장(경주 고향)을 만난 것이다. 청주ㆍ대구교대가 연합으로 RNTC학생대대를 이루었다. 1년차 320명, 2년차 320명 합계640명이었다. 그 학생대대 행정반장은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제대말년에 그곳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날그날 달력에 ×표를 쳐나갔다. 군사기초훈련에 너무 지쳤다. 땀범벅에다 피로가 겹쳤다. 밤이다. 학생대대 정반장이 찾아 왔다. “동생 일어나 봐! 훈련받는다고 수고 했다. 막..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5. 남천의 금입택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5. 남천의 금입택 이영백 내가 태어난 집은 남천 시래천변 초가이었다. 어린 날 아버지가 목수였으니 그나마 남의 집에 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신라 전성기에는 무려 39채의 호화저택이 있었다. 이른바 금테 두른 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으로 그 중에서도 으뜸은 남천에 있던 김유신의 재매정(財買井)종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덕왕(702~737)때 극성기를 맞아 수도인 경주는 17만 8,936호이고, 1,360방, 55리, 39 금입택(金入宅) 4절 유택(四節游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였다. 통일 후 약100여 년간 번영을 누렸다. 삼국통일시대 “경주호수가 17만 8천호×5인=890,000명이다. 지금의 경주시 인구보다 1천300년 전의 인..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4. 남천과 재매정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4. 남천과 재매정 이영백 신라는 우물로부터 시작한다. 시조 탄생지 넝쿨우물 나정(蘿井), 알영부인이 태어난 오릉 속에 있는 계정(鷄井), 김유신 장군 종가의 재매정, 쪽샘, 요석궁의 설총이 물마시고 자라서 유명하게 된 총명수인 경주향교 우물, 분황사 우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연구자가 삼국의 우물을 조사하였는데 260개중 신라에만 자그만치 210개라니 과연 우물이 많다고 할 것이다. 형산강 남천 하류에는 신라 천 년의 기가 모인 곳이다. 요즘도 월정교 복원과 교동 한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남천 하류에 잊지 못하는 곳은 김유신장군 댁 “재매정(財買井)”이다. 남천 거랑 가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장군이 물 마신 재매정이 허허롭게 요즘에는 우물만..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3. 서천 새벽강물의 빛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3. 서천 새벽강물의 빛 이영백 옛말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고 하였다. 초등학생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스스로 공부하려고 택한 것은 고난의 길이다. 아침에 기상하여 서천 둔치에 일찍 나가는 것은 일상생활 중에 가장 행복하였다. 그곳은 반겨주듯 백로, 왜가리, 비둘기 등이 모여 있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지만 물속 물고기도 있다. 서천 새벽강물의 빛 보러 나가는 것이다. 서천 건너 송화산에는 삿갓구름을 두르고 비 올 듯 알려 준다. 서천교를 지나 보이는 높은 곳으로 선도산이 지척이다. 저절로 시 한수가 나올 것 같기도 한데 멀거니 선도산 만 바라본다. 서천 물이 흐른다. 경주의 남천, 서천, 북천이 에두른 시가지에 신라 천 년의 터라고 말..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2. 서천과 가정교사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2. 서천과 가정교사 이영백 1968년은 내 인생에서 행운의 해이다. 지방 K고등학교에 남자면 누구나 입학하고 싶어 하던 학교이다. 그곳에 268명 중에 입학하였다. 아버지 몰래 공부하여 입학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러나 못 알리고 입학하였다.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를 모두 찾아 나섰다. 석 달마다 나오는 공납금 6,700원은 어린 나의 목을 조르기에 충분하였다. 2학년부터는 돈 벌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다가는 당장에 “학교 집어 치우라”는 말 밖에 듣지 못하니 땅 팔 노릇이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에게 돕는다.”라고 하였던가? 담임 선생님(영어과 신철규)이 불러서 교무실에 들렀다. “이군! 자네 공부하는 데 ..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1. 선도산 치어다보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1. 선도산 치어다보다 이영백 고향 불국사에 들리면 꼭 “동리목월기념관”에 가서 소설과 시 장르에서 훌륭하신 우리나라 두 문학인을 찾는다. 경주를 빛내어 주신 두 분이 너무 존경스럽다. 학위 논문제목도 “동리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양상연구”로 취득 하였다. 또 고향 들릴 때 벌써 몇 번을 모량리 목월생가에 들리곤 하였다. 시인 박목월(본명 영종)의 시는 고교 때 “산도화”에서 배웠다. “산은/구강산(九江山)/보랏빛 석산(石山)//산도화/두어 송이/송이 버는데//봄눈 녹아 흐르는/옥 같은/물에//사슴은/암사슴/발을 씻는다.”라는 시를 읊었다. 이른 아침 서천에서 선도산(仙桃山, 390m)을 본다. 스스로 서천변에 나가 서쪽의 산, 선도산을 치어다본다. 선도..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50. 옥녀봉 바라보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50. 옥녀봉 바라보다 이영백 남천에서 훌쩍 서천으로 나온다. 경주는 형산강 중류로 그 지천이 여럿 있다. 남으로 남천, 서로 서천, 북으로 북천(알천)이 있다. 서천 주변에서 고등학교 다니며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얻은 무척 아린 곳이다. 집 떠나 돈 벌어가며 공부하던 학창기에 시련 겪으며, 연탄가스 마시고 죽음의 눈물을 흘린 곳이다. 그로인하여 아울러 삶의 힘을 더 기른 곳이기도 하다. 경주 서쪽을 보면 아래시장(=현 중앙시장)에는 건물도 없이 난전을 펴던 곳이다. 서천 무너미 땅까지 걸어 야트막히 흐르는 서천의 징검다리 건너면 송화산(160m)이요, 황톳길로 오롯이 보이는 옥녀봉(276m)이다. 고교 1학년 때는 그래도 공부의 양이 적어 여러 가지 아르..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제6부 강의 미학1 49. 장군교 밑 서성이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제6부 강의 미학 1 49. 장군교 밑 서성이다 이영백 신라 도읍이 있었던 곳 홀로 경주시내에서 친구만나보고 내자가 대구에서 몰고 올 승용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경주 서천교에서 형산강 하류 쪽으로 사부작~ 사부작~ 걸어갔다. 요즘의 장군교 밑까지 걸어갔다. 장군교는 처음부터 사람이 다니던 다리가 아니다. 본래는 대구-경주역을 지나 불국사로 향하는 동해남부선 기차 다니던 철교다. 송화산(276m)아래 김유신장군묘로 건너던 장군교 교각 하부에 2018년 아트세상에서 신라와 관련되는 그림을 그렸다. 밤이면 그냥 두지 않고 아름다운 전기조명이 들어온다. 둔치에서 자전거, 인라인, 조깅과 산책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김유신장군묘 쪽에서 15개, 성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