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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5) 또천달 형산강 72. 형산강과 결혼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2. 형산강과 결혼 이영백 형산강 하류를 건너고 또 건너 다녔다. 강은 여전히 가로질러 다녀도 존재한다. 강을 떠나 동해 바닷가 조그만 학교에서 풍금 치면서, 파도소리를 엮어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그렇게 강 건너 강과 결혼하였다. 사람들이 어디 “처음부터 그렇게 가난하게만 살아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총각으로 낮에는 악동들과 씨름하고, 밤이면 형광등 아래 중등준교사 국어공부를 하고 지냈다. 현직교사들은 공부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근무시간 마치고, 바쁘게 술집으로 모두 향하였다. 교감은 대구 8년 만기로 시골 바닷가에 발령 난 것이 그렇게 한스러운 모양이다. 매일 직원종회 마치면 5미터 바닷가 골방 술집으로 아지트를 찾아갔다. 교장이 퇴근하고 나면..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1. 포항 오거리, 육거리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1. 포항 오거리, 육거리 이영백 1973년도 출장으로 포항을 자주 들락거렸다. 구두바닥이 닳도록 걸어 다녔다. 시내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살방살방~ 걸어서 오거리 H사진관에 들려 실적사진 현상을 맡기고, 지난번에 맡긴 사진을 찾는다. 죽도시장 입구다. 오거리에서 업무마치고 육거리 상원동까지 걸어가면서 시골선생이 도시를 구경한다. 교육청 앞이 육거리다. 포항은 오거리, 육거리가 있다. 토요일 수업을 파하고, 대구에서 시골로 오신 K교감과 함께 포항나들이 한다. 초자교사 앞에 주름잡는다고 “오늘은 최고 한식집에 가자.”라고 제안하여 육거리 동편 유명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찢어지게 가난하다 쥐꼬리봉급 받는 교사에게 고급 한식당이니 쫄 수밖에 없다. 교감은 경력..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70. 포항 죽도시장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70. 포항 죽도시장 이영백 형산강 하류 칠성천에 “죽도시장”이 있다. 죽도시장이 어떻게 생겨났느냐고 물으니까 포항 본토백이 사람들도 흔히 “죽도동에 있으니까 죽도시장”이라고만 말한다. 분명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한 것이다. “죽도(竹島)”글자에서처럼 시장이 자리 잡고 있던 터가 “대나무 숲”이다. 포항자체가 섬과 섬 사이를 매립해 만든 도시이기에 “섬도(島)”자를 잘 붙였다. 무성하던 대나무 숲이 사라진 건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숲을 밀고 난전을 형성하면서 시장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후 1971년 정식 개설허가를 받고 현대식 아케이드형태의 시장이 된 것이다. 첫 직장은 지행면(현 장기면) 모포국교로 학년마다 단일학급이라 교사 수가 적다. 자연히..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9. 5원짜리 엽서 한 장에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9. 5원짜리 엽서 한 장에 이영백 교육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을 1973년 5월 1일자로 초등학교 교사직 받았다. 포항시교육청 산하 영일군 지행면(현 장기면) 모포국민학교에 발령이 났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곳을 아무도 몰랐다. 허겁지겁 포항시교육청으로 갔다. “발령통지서”를 받아야 현지 학교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산강을 따라 직행버스에 올랐다. 포항 시외버스주차장에서 시내버스 타려고 걸어갔다. 오거리 죽도시장이다. 또 교육청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담당 장학사님을 찾아 갔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늘이 노랬다. “엽서로 발령통지를 보냈는데 왜 5월 1일자에 오지 않았지요?”라고 물었다. “외지인 울산에서 아르바이트 하였습디다. 우편함도 없는데 마당에..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8. 1966년 울릉도 가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8. 1966년 울릉도 가다 이영백 그렇게 배를 탔다. 1966년 8월 18일 아침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28명을 초청한 분은 마중 나오지 아니하였다. 앞이 캄캄하다. 1인당 쌀 한 되, 현금 일천 원씩 소지하고 집 나온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식생을 그린 울릉도 지도 달랑 한 장이 전부다. 그 지도가 유일 가이드다. 1965년 포항에 갔던 기억으로 28명이 형산강 따라 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청룡호(380t)는 태풍으로 꼼짝하지 아니하였다. 촌아이들이라 영화구경도 가고, 손에 있는 돈은 막 써댔다. 이틀 밤 자고 17일 출항하였다. 아직 태풍이 덜 해제 되었는데도 480명은 출항하였다. 평상시 열 시간이면 도착하였는데 네 시간을 더 넘겼다..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제8부 강의 결혼 67. 퐝 처음 만나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제8부 강의 결혼 67. 퐝 처음 만나다 이영백 짧은 생이지만 포항을 처음 본 것은 1965년 6월 28일 월요일 오후이었다. 그때는 천지분간도 못하던 시골뜨기 소년이었다. 지인이 P수산대학 야간부에 다니면서 기말고사 치른다고 하는데 나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1965년 해도동(海島洞)은 아예 없었고, 늪이다. 더욱 종합제철인 포스코도 없던 시절이다. 포항 가는 방법도 경주기차역에서 차표 끊어 타고 형산강 따라 포항역에 내린 것이다. 어디엔가 밤에 여관 얻어 쉬라고 하곤 그 지인은 시험 치러 갔다. 기차타고 이방에서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 곁에는 지인이 시험 치르고 어느 샌가 와서 씻고 있다. “아이고 곤히 자더구마는 내 땜에 깼제.” “아뇨, 아닙니다.”..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6. 금장대 오르다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6. 금장대 오르다 이영백 고향을 늘 가슴에 묻고 산다. 천 년 문화를 조금 더 이해하려고 하나씩 껍질 벗기고 산다. 오늘은 복원된 금장대(金藏臺)를 올라 본다. 세 갈래 길에 이르러 왼쪽은 “금장대”, 오른 쪽은 “암각화”라고 외로운 이정표가 내 마음을 두근두근 두들긴다. 얼른 결정하라고 다가오기에 “금장대”오르는 길을 택하여 오르고 만다. 금장대는 형산강(서천)과 경주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풍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경치가 하도 아름답고 빼어나 하늘을 날던 기러기도 쉬어간다고 하였던 신라 삼기팔괴의 한 곳이기도 하다. 형산강에서 서천과 북천(알천) 두 지류가 만나서 만든 “애기청(涯岐淸)소”는 이곳 출신 김동리 소설에 나오는 「무녀도(舞女圖)」..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65. 서천의 애기청소 엽서수필 5 :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65. 서천의 애기청소 이영백 늪인 “소”는 우리 고유어다. “소ㅎ”로 ㅎ종성체언〔去聲〕이다. 한자어 沼는 예스런 발음으로는 〔죠〕, 〔쇼〕이다. 소는 “땅바닥이 두려 빠져 물이 깊은 곳”, “늪” 또는 강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굽은 못〔曲池〕”이다. 경주 “애기청소(涯岐淸沼)”의 표현은 “-沼”가 아닌 “-소”라야 올바르다 생각한다. 현지에서 예기소(藝妓沼), 금장소(金藏沼)라고도 하며, 흔히 한자어로 “崖岐淸沼”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崖岐淸소”라 표현하고 싶다. 崖岐淸소는 신라 20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예기소에 빠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설화는 “자비왕은 미색과 주술로 겸비한 을화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