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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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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72. 미나리꽝에 꽃피다 72. 미나리꽝에 꽃피다 이영백 초교에 들어가기 전 해에 세 번째 집으로 이사해 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깊은 우물이 집 대문 바로 앞에 있어서 좋았다. 물론 물이 깊어 두레박줄이 길어서 힘이 들었지만 물맛 좋기로는 서당 다니던 여덟 살 소년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우물이 가까이 있어서 좋았다. 밥반찬으로 봄 미나리가 있었다. 미나리는 한자어로 외자인 “근(芹)”이라고 하였다. 시경(詩經)에서는 “근채(芹菜)”라고도 하였다. 미나리는 시장에서 구입하여 생으로 된장에 찍어 먹어도 되었다. 미나리가 굵게 자란 뿌리부분은 썰어 “미나리김치(芹菹)”를 담가 먹었다. 더운 여름에는 그렇게 시원하고 맛 좋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대문 앞 묵지에 미나리를 심자고 하였다. 깊은 우물에서 동네 아낙이나 ..
(엽서수필) 71. 좁쌀 하나 71. 좁쌀 하나 이영백 씨 중에 작은 씨앗은 “겨자씨”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겨자씨를 일상생활에서 잘 볼 수 없다. 우리나라 쌀·보리·콩·조·기장 등을 오곡이라 하는 데 이 중 조는 껍데기를 벗기고 음식 해 먹으려면 “좁쌀”이라 하여 “조”자에 “ㅂ”이 추가되어 “쌀”과 합성어다. 조는 우리나라에서 1963년에 대량생산 이후부터는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해에 초교 졸업하고 서당 다니면서 집안의 소소한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오늘날과 달리 저수지가 없어서 날이 가물면 거개가 천수답이라 오로지 하늘이 내려주는 비만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기다리던 비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매년 6월 21일 전후인 하지까지 비가 오지 않는다면 모내기는 할 수 없다. 1963년 그 해는 참 많..
(엽서수필) 70. 둑새풀 촛불잔치하다 70. 둑새풀 촛불잔치하다 이영백 추운 겨울이 지나고 흰나비 팔랑거리는 봄이 되었다. 봄이 되면 세상의 만물이 소생한다고 한다. 나뭇가지에 새 잎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땅바닥에 나서 자라는 수많은 풀 종류에서도 싹이 나서 자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온통 녹색 밭이 된다. 우리는 해마다 식량을 위하여 논에다 보리를 가을에 씨 뿌려 둔 논보리 밭이 있다. 어김없이 둑새풀이 보리보다 많이 자라 온통 보리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둑새풀은 그 이름도 무섭다. 경상도에서는 “독새풀”이라고 하였다. 보리밭에서 뱀이 잘 나오는 이 풀이 자라고 있기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전해온다. 또 잘 죽지 않기에 원망하는 조의 이름이다. 둑새풀은 보리와 같이 생존하는 두해살이 풀이다. 5~6월에 꽃이 피고 꽃이삭은 원기둥모..
(엽서수필) 69. 손톱 살펴라 69. 손톱 살펴라 이영백 사람의 손끝에는 손톱이 있다. 고정된 생각에서 만약에 손톱이 없다면 이상할 것이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가지런한 손톱을 가지고 있다. 부모로부터 고맙게 양질의 좋은 손톱을 물려받은 것으로 나의 행복이다. 늘 단정히 깎아서 예쁜 손을 유지한다. 초등학교 교사시절에는 주중인 수요일마다 용의검사 하여 긴 손톱가진 학생을 체크하였다. 하학시간에 손톱깎이로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깎아 주었던 일이 어제 같다. 손톱은 왜 손톱이라 불리었을까? ‘손톱’은 명사고 합성어다. 손가락 마디 끝에 붙어 있는 딱딱하고 얇은 조각이다. ‘손+톱’으로 이루어졌다. 손은 우리 몸의 일부이지만, ‘톱’은 순우리말에서 그 어원을 찾아야 한다. 옛말 형태로 찾아보면 ‘돋>돛>돕>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으..
(엽서수필) 68. 고구마 꽃피다 68. 고구마 꽃피다 이영백 어린 날 세 번째 살던 집 곁에 채소밭이 있었다. 그곳은 문전옥전(門前玉田)이었다. 들며나며 채소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가장 아끼는 밭이었다. 그 해는 유별나게 더웠다. 아버지는 그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를 심으려면 준비를 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여러 곳에 밭을 경작하면서 지형과 위치에 따라 어떤 작물을 심을까 정하였다. 그러기에 고구마는 수시로 관리하기에도 좋은 집 곁에 정하였던 것이다. 밭은 관리가 잘 안되면 동네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우선 씨로 보관하여 둔 고구마를 모종용으로 싹 틔었다. 무성하게 자란 싹은 모두 잘라서 그늘에다 모아 덮어 두었다. 밭에 골을 만들고 비 오기만을 기다린다. 고구마는 비가 오는 중에 심어야만 활착을..
(엽서수필) 67. 족제비싸리나무 꽃이 필 때 67. 족제비싸리나무 꽃이 필 때 이영백 식물의 이름이 재미나다. 족제비싸리나무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데 그 먼 타국에서 어찌 동양의 조그만 나라까지 찾아왔을까? 일본이 만주에 나라를 세우면서 이 나무를 심었다. 근세조선 말 우리나라가 피폐해지고 마침내 1910년 나라까지 빼앗겼다. 1930년대에 헐벗은 강산 우리나라에 강제로 옮겨와 심겨진 나무가 바로 족제비싸리나무다. 내가 어렸을 때 사방공사가 한창이었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잔디와 싸리 씨 채취에 동원(1962)되었다. 족제비싸리나무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일제침략기에 수입해 온 것을 이미 알았다. 그래서 아까시나무와 구분하여 침이 없는 나무라고 “왜싸리”라고 불렀다. 족제비싸리는 족제비도 아니..
(엽서수필) 66. 잉걸불을 쬐며 66. 잉걸불을 쬐며 이영백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정연료가 중요하였다. 저녁 먹고 나서 전기도 없던 시절 초저녁잠이 들면 어느새 방이 싸늘해진다. 아버지 슬며시 일어나서 “군불”때러 나가신다. 밥하는 것도 아니요, 음식을 장만하려고 불 피우는 것도 아니다. 참 솥에 물 들이부어 물만 펄펄 끓인다. 오로지 추운 방바닥을 덥히려고 한 일이었다. 장작이 타 들어가면서 거대한 불꽃이 춤추며 마른 장작에 불이 붙어 뜨거운 잉걸불로 남는다. 전근대 농사짓고 살던 가정에서는 연료가 거개 짚이었다. 짚은 짚단에 알맹이를 모두 떨어버리고 남은 소산물이다. 그런 짚을 연료로 사용하였다.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보관을 잘하여 두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살이에서 그러하듯 비를 맞아 축축한 짚으로 밥을 지으..
(엽서수필) 65. 과꽃을 그리며 65. 과꽃을 그리며 이영백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고학년만 내리닫이 맡았다. 초임 3년간 4, 5, 6학년, 두 번째 4, 6학년, 세 번째 6학년, 네 번째 5, 6학년, 마지막 학교는 6학년 등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동요 중에“과꽃”이 가장 많이 가르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 했지요./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2)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나도 그랬다. 정작 “과꽃”동요를 계속 가르쳤으면서도 가르치는데 삶이 바빴는지 모르겠지만 천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노래만 가르쳤다. 도대체 과꽃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