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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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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 미늘 30. 무밥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30. 무밥 이영백 식구 많은 집은 늘 부족한 것이 밥이었다. 특히 저녁시간이면 때를 놓친 사람은 저녁밥이 아예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시간은 꼭 지켜야 굶지 않는다. 우리 집 저녁시간은 언제나 정확하였다. 일곱 시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식구도 많았지만 과객(過客)이나 일 거들어 준 이웃사람인 품꾼들도 많이 있었다. 저녁 답이면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마당에 멍석 펴고, 남폿불 처마에 내다 걸어 환한 마당에서의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스무 남 전후의 사람들이 매일 같이 밥을 함께 먹어야 하였다. 늘 부족한 식량이 걱정이었다. 점심에는 아침에 해둔 무밥을 먹었다. 반찬이라고는 강된장 끓여둔 것 밖에 없었다. 찌룩한 물기 많은 무밥은 밥그릇마다 무밥을 ..
(엽서수필 3) 미늘 29. 조밥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29. 조밥 이영백 하얀 쌀밥 위에 덧 담은 노란색 조밥은 먹음직스럽다. 아니면 조금씩 섞이어 동그란 작은 노란색이 듬성듬성 보여도 좋다. 요즘은 조밥이 별미다. 다섯 가지 곡물 중에 조가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오대 곡물이라 한다. 오늘날 별미로 먹는 조밥이 좋다. 조밥은 겉으로 좋아 보인다. 그러나 막상 삼시세끼로 매일 먹어본 사람이면 차조밥이 금방 밀리고 말 것이다. 나중에는 노란색만 보아도 느끼함을 느낀다. 그것이 차마 삼시세끼 때마다 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죽을 만치 먹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차라리 새카만 꽁보리밥을 먹으면 좋을 것이다. 노란 조밥은 넘어가지를 않는다. 여북하면 엄마는 차조를 쪄 절구통에 짓..
(엽서수필 3) 미늘 28. 들밥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28. 들밥 이영백 어렸을 때 경주분지(盆地)의 끝자락에 살았다. 소한들이 있는 들판 가장자리였다. 형산강 남천지류인 시래 천변으로 논벌이 펼쳐져 있다. 오뉴월 농사철이면 부지깽이도 가만있지 못하게 바쁘다. 오늘은 모내기 날이다. 새벽부터 아버지, 형님들, 큰 머슴, 중 머슴은 모판에 피사리하고 이제 모를 쩌 내었다. 모판의 여린 모를 모판바닥인 흙을 다잡아서 모 뽑아 한 춤이 되면 짚 훼기로 단을 묶는다. 논둑에는 아버지 담뱃불인 개 쑥부쟁이로 묶어 만든 봉에서는 꺼질듯 말듯 아련히 흰 연기를 계속 피워내고 있다. 아버지는 다음 심을 논에다 써레질을 한다. 그날 모내기는 못줄 한 번 넘어가고부터 연이어 그렇게 하면 논바닥에서는 모가 심겨진다. 동해남부선 부산가..
(엽서수필 3) 미늘 제3부 시대의 변명 27. 초백이 밥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제3부 시대의 변명 27. 초백이 밥 이영백 밥을 담아 먹는 그릇은 밥그릇(食器)이지만 밥(반찬ㆍ수저 포함)을 담아 이동하여야할 때 그릇인 것을 “도시락 통”이라 한다. 도시락 옛말은 “도슭”이었다. 그러나 내가 살던 시대 내 고향에서는 양은 도시락 통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서부터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였다. 최초로 도시락을 싸야하는 4학년이 되었다. 수, 토요일을 제외하고 주당 4일은 도시락을 싸가야 하였다. 생애 최초 엄마가 들려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갔다. 네 시간이 끝나고 저마다 가져온 도시락을 펼쳤다. 엄마는 첫 도시락을 나에게 유별나게 크게 묶어 싸주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매우 큼지막하였다. 묶인 보자기 풀고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장군이 먹을 만큼..
(엽서수필 3) 미늘 26. 벼루에 먹 갈며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26. 벼루에 먹 갈며 이영백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문인들이 가깝게 두고 친구로 여기던 네 가지 도구인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를 의미한다. 어린 날 서당에서 묵직한 돌벼루(石硯) 만났다. 뭉툭하고 마냥 무겁기만 한 돌벼루였다. 서당 훈장님 앞에서 꿇어앉아 조신하게 먹을 갈아야 하였다. 좁은 서당 방안에 먹 갈면 묵향이 은은히 방에 가득 채운다. 코를 즐겁게 만든다. 벼루를 “연지(硯池)”라 한다. 좋은 벼루 하나 마련하고, 좋은 글귀를 받아쓴다면 그렇게 행복할 것이다. 연지 곧 벼루는 먹을 가는 데 쓰는, 돌로 만든 문방구를 가리킨다. 연적의 물을 약간 연지에 붓고, 먹 막대 끝을 살살 돌려가며 평평한 벼루에다 먹 갈아서, 마침내 글씨를 쓴..
(엽서수필 3) 미늘 25. 지게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25. 지게 이영백 어린 날 나의 양 어깨에 굴레가 따라 다녔다. 바로 지게였다. 조그만 물건이라도 지게에 지고 다녀야 하였다. 그 시절 그때는 물건 이동수단에 지게만한 게 없었다. 한 동네 부잣집에 겨우 수레가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일반 서민들 집에는 남자꼭지 수만큼이나 집집마다 지게가 있었다. 짐을 많이 얹을 수 있게 곁들여 바지게도 있었다. 인생지게로 무게를 주었다. 우리 속담에 “낫 놓고 기역자(ㄱ)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지게 놓고 A자도 모른다.”라고 한다. 이는 대영박물관에 한국지게가 있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한 외국군이 지게를 보고 “A자 모양의 틀(A frame)”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지게라고 하면 지게에 지고 가버..
(엽서수필 3) 미늘 24. 빨간약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24. 빨간약 이영백 빨간약이 무슨 약인가? 요즘은 수은(Hg)을 함유하고 있어 약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성분이 다른 “포비돈 요오드용액”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소비자들은 “빨간약”이라 부르고 그대로 잘 판매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1960년) 3월이었다. 아버지 끙게로 보리밭에 흙덩이를 뭉개어 보리 뿌리를 돋워주고 있었다. 끙게라는 것이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 이랑을 소로 끌고 갈 때는 편하다. 그러나 밭둑에 오면 돌이 얹힌 무거운 끙게를 들고 움직여야 하므로 아버지가 힘이 많이 들었다. 마당에 놀고 있는 나를 불러 끙게에 호시 태워 주었다. 밭둑에 다가오면 재빨리 일어서서 빈 끙게를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앉아서 그만 멈칫거리는 동안 황소뒷발에 나의 ..
(엽서수필 3) 미늘 23. 생콩 씹다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23. 생콩 씹다 이영백 사람이 살아가면서 급하면 급한 대로 약방보다 민간조약(調藥)으로 치료하기 마련이다. 시골에서는 그렇게 하고 살았다. 물론 요즘이야 좋은 약이 많아서 약국으로 바로 달려갈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돈이 귀하고, 웬만하면 조약으로 대처하곤 하였다. 어떨 때는 생콩도 약이 되었다. 요즘에 와서도 생식마을에서는 콩과 솔잎으로 식사대용으로 한다. 기회가 있어서 생식마을에 들렀는데 오히려 생식(生食)을 하면 좋다고 역설하였다. 화식(火食)은 음식을 너무 맛나게 만들어 포식하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사람이 살찌거나 아프다고 하였다. 생식하면 강건하고, 살찌지 아니하고, 질병에도 잘 이길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하여 설명하는 데 오히려 나는 할 말을 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