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
117. 미늘 풀다
이영백
의자에 앉으면 글을 쓴다. 창 밖 뜨거운 열기를 식히려고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번개로 우레 친다. 세차게 검은 줄기처럼 굵은 소낙비가 묻어와 창을 때린다. 창 닫아도 열기 식히는 우렁찬 빗소리를 듣는다. 인생 사는데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모두가 하늘에서 정한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인간에게 준다. 그 속에 나도 이제까지 살아온다.
미늘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살아온 날들이 그 며칠인가? 73년이면 이만 육천육백사십오 일이네. 이런 셈하고 있는데 어느새 비 그치고, 텃새가 고요 속을 뚫고 소리 깨트린다. 뻐꾸기 구슬피 울어준다. 막 잠깬 듯 쓰르라미들이 동네 합창을 한다. 창밖은 마지막 여름으로 아주 바쁘다.
평생 미늘에 걸린 삶을 풀어내려고 안간힘 써 보았지만 그게 그것이다. 아들 둘 키우느라 내자 고생도 많이 하였는데 그 옛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큰아들 태어나서 약포밖에 없던 두메에서 자랐다. 밤새 열 내리느라 한 숨도 못 잤으면서 첫차 타고 약 구해오니 아이는 생글거린다.
둘째아들 태어나고 큰집이나 처가로 나다니느라 철거덩거리는 비포장도로에 버스라도 어서 만나는데 비중 두었다. 그렇게 키워 둔 아들 둘, 큰아들은 권식 데리고 캐나다 BC주 에보츠포드市에 살고, 둘째아들 손자ㆍ손녀 공부한다고 저네 외가 필리핀 불라칸市로 갔다. 집안이 조용하다.
미늘에 걸린 것 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올가미가 된다. 모든 것을 버리려하듯 풀어놓고 살자. 오늘도 글 쓴다. 글로 풀어낸다. 조그맣게 응어리진 어려움을 글로 풀어내면 한 소쿠리 째 담아 놓을 수 있다. 풍성하게 풀어 놓으면 하늘에 저만치 떠오른 보름달이 가득 담기어 온다.
미늘은 삶에서 올가미라고 생각하면 절대 풀리지 않는다. 넌지시 모르는 척 기다려 주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다. 안심하고 저절로 풀리어질 때 참 오래 만에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욕심내면 자꾸 더 옥죄일 뿐이다.
가장 늦었다고 판단할 때 그 순간이 가장 빠른 판단이다. 미늘에서 풀리려고 한다면 시ㆍ공간과 흐름에서 모두가 정점에 딱 맞아 떨어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풀리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한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무던히 애써보면 실타래 풀리듯 인생은 참 자유로 미늘이 풀릴 수 있다.
(20210911. 토. 미국 911테러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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