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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3/미늘

(엽서수필 3) 미늘 3. 책상 앞에서

엽서수필 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3. 책상 앞에서

이영백

 

 나는 현재도 살아 있다. 중학생 때 생 오징어무침 먹다 목에 걸려 죽을 번하였는데 지나가던 노옹이 익모초 뜯어 돌에 짓이겨 먹여 주어 목숨 건졌다. 고2때 입주 가정교사하다 11월말 연탄가스 불 피워서 가스 마시고 죽다 살아났다. 도회지 살면서 이웃사촌들과 임하계곡에 여름밤 다슬기 잡다 헛디뎌 물귀신 되다 살았다. 아직 책상 앞에 앉아 글 쓰고 있다.

 젊어서 직장을 가졌는데 교사라고 하여도 잡무 핑계로 고사리 손잡고 기본부터 제대로 못 가르치다, 8년 하다 떠났다. 그 8년 경력으로 제자들이 지금 나를 찾는다. 너무 부족한 선생이었는데 그 제자들이 찾는다. 내가 가르친 것이 무엇 있다고 국가 세금만 축내다 왔는데 너무 고마운 제자들이다. 요즘 스승의 날에 화환 보내온다. 정겨운 목소리 “선생 니~임”이라 불러 주는 전화 속 목소리는 큰 울림이었다. 너무나 고마운 목소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 송구하였다. 연세가 많아서 전근대적 사고(思考)를 가진 아버지였지만, 막내를 시골에서 서당 다니게 하고 남에게 빌지 않을 정도로 한문공부만 시켰다.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살다 가라 하였는데 그 말 듣지 않고 신학문 하느라 중ㆍ고ㆍ대 8년을 헤매어서 허비하였다.

 어머니께 송구하였다. 단 하루라도 내가 공부하여 편히 사는 것을 보여드려야 했는데 결혼 3년째 되던 해에 아버지 따라가셨다. 어머님은 나를 기다려 주지 못하였다. 마흔넷에 열 번째로 낳아 자식 덕 못 보고 가셨다.

 중등준교사(국어) 공부하다 결혼하여 준 내자에게 미안하였다. 도회지에서 살다온 사람이다. 나란 사람미늘에 걸렸다. 두메산골로 7년간 헤매 다녔다. 다행히 다시 도시로 나왔다. 7년이 긴 장마처럼 너무 길었다.

 아들 둘을 낳았다. 큰 아들은 유치원을 네 번 이동하였다. 초교도 동천초교 다니다 신천초교 졸업하고, 둘째아들은 신천초교 다니다 동천초교 졸업하였다. 삶이란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제 그나마 글로 통하여 책상 앞에 앉으니 저절로 고백하고 만다. 모두가 허접한 나의 삶에서 비롯하였다. 장인 32년 모시다가 편히 보내 드렸다. 이제 국립대전현충원에 계신다. 연 3회씩 찾아뵙는다.

 삶의 미늘에 걸린 채 끝없는 이 자리까지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다.

(20210223.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