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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

[스크랩] (푸른 숲 제8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52.RNTC의 즐거움

신작수필

52. RNTC의 즐거움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교사도 사직하고, 1981년 대학 행정직으로 와서 생활한지도 10여년이 지나면서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었다. 누구는 대간첩부대나, 육군 전방 GOP근무, 귀신도 잡는 해병대, 제복도 늠름한 해군에 근무하였거나 아니면 사병보다 장교로 근무하였다고 자랑들을 한다.

 예비군 훈련을 가도 특정부대를 나온 것을 자랑으로 이야기꽃으로 피운다. 간혹‘군대를 어디서 근무하였나.’라고 질문을 받으면 더욱 열등의식에 졸아 들었다. 또 교육대학을 나온 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련히 나오는 말이‘교대졸업하면 단풍하사 주지.’라고 아는 체 할 땐 속으로 그 사람을 더욱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회피한 사람도 아니고 엄연히 법에 의해서 예비역으로 된 사람을 낮잡아 보는 통에 군대얘기가 나오면 아무런 대화도 못하고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RNTC 나와서 단풍하사면 어떻고 자격지심에 졸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RNTC 출신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의 기본교육인 초등학교에 봉직하였고,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다한 사람으로 무시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때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당시 1970년 10월 모집부터 인문계열도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처음 시작)에 지원할 뻔도 하였다. 당시 고교 동기 하나가 기어이 인문계열로 입학하여 육사를 나오기도 하였다.

 

 교육대학에서 RNTC제도를 운영한 황금기는 1969학년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이었다. 1991년 8월 28일자로 1992년 신학기부터 RNTC하사관후보생 모집이 폐지 되어버렸다. 나는 1971년 입학자로 RNTC 제4기생이다. 제1기는 1969년 2학년생(1968년 입학자)이었고, 1학년은 제2기, 1970년 1학년 제3기, 1971년 제4기가 되는 셈이었다.

 마지막 RNTC생이 희화화되어 라디오에 흘러나온 이야기가 있다.

 1991년 RNTC 마지막으로 지원한 사람의 이야기이었다. 교육대학에 남학생이라고는 단 3명밖에 없어서 RNTC모집대상 중에 지원한 사람은 2명이었다. 1명은 예비역이었다. RNTC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1명이 있어 단지 1명만 합격하였다.

 학기가 시작되고 RNTC훈련이 시작 되었는데, 단지 1명으로 훈련을 받았다. 첫 시간에 혼자 교장에 앉아 교육이 시작 되는데 교관이 들어오고 조교가‘전체 차렷!’이라고 해도 교육생은 단지 1명이었다. 인사를 하고 교육을 받는데, 졸리고 기지개를 켜도 졸리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고개 숙이고 자버렸다. 교관도 졸고, 조교도 졸고 모두가 잠이 와서 그냥 자는 시간으로 교육을 마쳤다.

 2년차는 6명이 있었는데, 선배라고 하여 옥상으로 불리어 갔는데, 후배를 얼차를 시켰다. 엎드려뻗쳐를 받고 오리걸음을 시켜 기합을 받고 나니 화가 났다. 바로 학군단 사무실에 들어가서 개인기합을 받아 억울해서 RNTC훈련을 취소하겠다고 하니, 조교가 붙들어 앉혀서 이야기를 하였다. ‘자네가 훈련을 안 받으면 당장 훈련조교 2명과 교관 2명 등 도합 4명이 집으로 가야 한다고 손이야 발이야 빌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RNTC훈련을 또 받으러 갔다.

 교육시간에 늦어서 선착순 기합을 한다고 했다. 나 혼자인대 무슨 선착순 기합이 있을 수 있느냐니까 혼자라도 농구 골대를 돌아 와야 한다고 해서 천천히 갔다 왔더니 조교가 그만 화를 내었다.

 교육대학에 남학생들이 지원을 하지 않으니까 참 별 희한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RNTC를 희화화하고 말았다.

 

 그 옛날 우리가 다니던 교육대학 한 학년에 4반씩 160명 중에 2∼5명이 빠지고 거개가 지원하여 훈련받던 RNTC는 어떻게 되었든가? 허무하게도 RNTC무관후보생은 그렇게 1992년부터 사라지고, 요즘 교육대학교에서는 영문자 글자 한자만 틀리는 ROTC제도만 남아 있다.

 RNTC를 나왔던 우리들은 당시 살기도 어려웠다. 취직도 군대도 모두 해결 되던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 물론 RNTC 제대로 비록 단풍하사가 되었지만 그때가 좋았다고 회상한다. RNTC무관후보 생도로 재학할 때는 유신헌법 데모에 교육대학생은 대학으로 돌아오라는 라디오 소리에 한 마디 불복종도 없이 착실히 공부하고 훈련받고 착하디착한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제대 후 현직에 발령 받아도 8년 동안은 의무 복무자로 교장명령을 착실히 이행하고 아무 탈 없이 지냈다.

 이제 RNTC 제도에 의해서 생각해 보니 고생도 많았지만, 당시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제자들이 잘 자라 주어 같이 살아가는 동시대에 그래도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서로 초청을 한다고 연락이 오고 중복되어 날짜를 물려서 만나기도 하였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OO초등학교 제OO회 동기회 일동”이라는 리본이 해마다 쌓이고 있다. 공직 35년 동안에 8년 교사를 하면서 다섯 군데 학교 중 네 학교에서 모포초교 제9회, 내북초교 제31회·제32회, 감포초교 제32회, 괘릉초교 18회 졸업생들에게 야기 련 『이군현 단풍하사』를 올린다. RNTC였기에 즐거움이 있었다. 󰃁

(푸른 숲/20100-20130717. 제65회 제헌절에)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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