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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

[스크랩] (푸른 숲 제8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49.향토예비군 훈련

신작수필

49. 향토예비군 훈련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RNTC 제4기로 졸업과 동시에 제대를 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근무하였다. 바닷가에 첫 번째 학교를 3년간 근무하고 인사이동으로 두 번째 산골로 가서 근무하게 되었다. 바로 포항시 동해면에 근무하면서, 여름 방학이 되면서 교사활동 중에 예비군 훈련대상자는 연례행사를 치러야했다. 그런데 산골에 사는 공당孔堂, 이곳은 해안가가 아닌데도 당시 영일군이라는 특수지역으로 같이 분류되어 교사 예비군훈련을 합동으로 받아야 한다.

 대한민국 예비군(ROK Reserve Forces)은 평상시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유사시에 소집되는 대한민국 예비전력이다. 적 또는 무장공비의 공세와 대남유격에 대처 향토방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1961년 12월 『향토예비군법』이 제정되었지만, 예산 등의 문제로 당시에는 부대 편성까지 이르지 않았다가 북한에서 1·21사태로 무장공비를 보내서 남북관계가 악화된 1968년 4월 1일에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

 그런데 교사들은 예비군훈련을 집단적으로 모아서 별도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1973년부터 예비군 훈련을 받아 왔다. 1973년 2월 20일 5관사(병)제18호 하사관으로 전역한 후 3월부터 바로 훈련이 나왔다. 당시 나는 아직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아서 일반 향토예비군이었다. 4월 1일에는 “향군창설기념일”이라고 해서 경주공설운동장에서 행사까지 있었고, 아울러 특식 음식까지 나왔다.

 향군 지역대에서 훈련이 나왔다. 즉 전반기 순회교육이었다. 우리 셋째형님이 지역 중대장이었다. 셋째 형님과 함께 향군훈련을 같이 받았다. 나는 당시 교육대학을 갓 나왔기 때문에 RNTC 단풍하사로 일찍 제대를 한 것을 보고서는 훈련조교 하사가 나를 무척 싫어했다. 그래도 교관은 가장 최근 제대자로 나를 지목하여 최근 FM총검술을 나에게 시연 하게 하고서는 그날 종일 교육을 면제 받았다.

 그해 5월 1일자로 교사발령이 났다. 당연히 주소를 근무지로 옮겼다. 당시 교사는 여름휴가 때 몰아서 순회교육을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닷가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순회교육 기간이 4일간이었다. 할 수 없이 중간에 다시 고향으로 옮겨 연간 2일간만 훈련을 받았다.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고향에서 주소를 옮겨 가라는 통지가 왔다. 내 고향마을에는 교사하는 사람이 나 혼자로 여름휴가 때 1명 대상자로 훈련 장소까지 와서 예비군 중대장이 확인하는 것이 매우 귀찮다는 것이었다. 기어이 초임지 모포로 다시 옮겨서 연4일간을 받다가 두 번째 학교 공당에 주소를 옮겨서 드디어 여름휴가 때 향군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동해면 소재지 예비군훈련 통지서가 나왔다. 훈련 장소는 동해면 동해초등학교 뒤편에 향토부대가 생겨서 훈련장이 준비되어 그곳에서 훈련을 하였다.

 교사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집단적으로 훈련을 받으니까 교사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그 백태망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 예비군복 옷매무새가 말이 아니었다. 옷이 너무 크거나 작아서 이상한 사람들이 되었다.

 둘째, 머리카락을 하도 길러서 모자는 얹었는데, 덜렁 얹혀 있어서 더욱 괴이한 모양을 하였다.

 셋째, 신발은 군화를 신지 않아서 흰 운동화로부터 별 희한한 색깔로 다양해서 이상한 집단의 발로 보이고 있었다.

 넷째, 수령 받은 카빈총은 바로 들지 않아서, 어디 불농군이 삽을 둘러 맨 형상이었다.

백태의 양상을 만들어 교사로서 체면도, 예비군으로서의 체면도 팽개치고 있었다. 교육에 들어가서는 정말 부여된 교육은 간곳이 없고, 진부한 교관의 경험담과 음담패설만 늘어놓고 있어, 우리 교사들에게는 강의 수준도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예비군 훈련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모두가 웅성거렸다.

 첫째시간이 지나고 나니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예쁜 간호사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내렸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준 군인이요, 준 군인으로서의 체면을 차리지 못하고 하물며 휘파람을 부는 선생도 있었다. 그러자 이제는 군 보건소에서 나왔다면서 출산이 많던 당시로는 정관수술을 하면 산아제한 정책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기는 요즈음은 아기를 하도 안 낳으니까 둘째, 셋째부터는 오히려 장려금까지 준다니 세태는 정말 재미있는 시대가 아닌가.

 둘째시간에는 보건소에서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정관수술精管手術이 남자의 피임으로선 가장 효과적이다.”

“수술이 절대 아프지 않다.”

“정관수술을 하면 정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이다.”

“여자의 출산고통을 덜어 주자.”

“장화보다 번거롭지 않고 느낌이 어떻고…….”

등등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솔깃한 얘기는 바로 이 수술을 받은 사람은 예비군 훈련을 면제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 참 난감하였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 수술을 하여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더러는 일어서서 시술을 받으러 간다고 따라나서고 있었다. 제법 상당수가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간호사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따라 나서지 않은 우리에게는 매서운 보복(?)이 따라 왔다.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곧장 자갈밭에다가 낮은 포복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여름에 더워서 예비군복 하나만 걸친 무릎을 자갈밭에 엎디어 기어가게 하니 이 또한 천지가 내려앉는 형벌(?)이 아니겠는가? 물론 군 시절에는 모두가 경험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니 세상 천지에 이런 형벌이 어디 있는가? 이론상은 낮은 포복을 훈련해야 무장공비를 잘 잡는다(?)는 데에 귀결하는가 보다. 누구는 뙤약볕 자갈밭에 훈련을 하고, 누구는 예쁜 간호사와 함께 앰뷸런스 타고 가느냐 말이다. 하하하……. 그저 웃자.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일담에 들으니 그날 간단한 수술을 받고 집에서 종일 휴식하면서 행복해 하였다는 데 그게 전부 다는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난 후에 이상이 생겼단다. 그러니까 다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소 1주일은 지나야 하는데, 수술 후 며칠도 못 참아서 기어이 선생답게 일(?)을 저질렀으니, 그 수술은 온데 간데도 없었다. 그 후유증은 어떠하였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 선생님 왈 찾아 가지도 못하고, 전화만 하니까‘특수한 경우는 그럴 수도 있다.’고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부실한 일로 예비군이 예비전력으로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정책에 따라서 거꾸로 예비군이 고통이었다. 제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그런 정책은 고쳐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적어도 RNTC단풍하사라도 나온 사람이면 그런 몰지각한 세상일에 현혹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도구-약전 앞을 지나면서 그 때 그 예비군 훈련장소가 활동사진처럼 지나가곤 한다. 아! 그 옛날의 교사 예비군훈련 때 간호사 뒤를 따르던 그 선생님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요즘은 그곳에 포항공항의 비행기 소음만 요란하게 들리고 있다. 그리곤 간혹 도구해수욕장의 파도 소리와 백합을 줍는 소녀들이 아른 거릴 뿐이다. 󰃁

(푸른 숲/20100-20130714.)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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