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

[스크랩] (푸른 숲 제8수필집)이군훈의 단풍하사-46.제4기 RNTC임관식

신작수필

46. 제4기 RNTC임관식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RNTC학군단 2년차가 되면서 RNTC훈련 시간도 줄어졌고, 몸으로 훈련으로 받는 것보다 통솔법, 분대장 임무, 소대장임무 등 과목으로 정신적인 이론과목으로 공부하게 되는 것이 더 많았다.

 1972년 RNTC하사관후보생 훈련도 끝나서 RNTC임관식이 1973년 2월 20일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보니 교육대학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되었고, 단지 한 과목인 의전과목만 남아 있었다. 방학이었지만 분대분열을 연습하여‘임석관님께 경례!’하는 등 단체 연습을 1주일간 하였다.

 이것이라도 하여야 그렇게 많이 했던 군사훈련이 몸에 밸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임관하면 너무 쉬워서 안 되겠지, 아니 섭섭하겠지.

 문제는 종합평가가 남아 있었다. 2년간 군사훈련 27과목을 모두 배웠다. 5관구에서 대위급 이상 교관들이 참가하여 이론 시험을 먼저 치르고, 개인별로 실기평가를 실시한다. 과목당 과락 없이 60점 이상이라야 임관이 된다고 하였다.

 먼저 추운 겨울에 사방 2m이상을 떨어져 앉아서 이론시험을 치렀다. M1, Car, 3.5인치 로켓포, 60mm박격포, 106mm무반동총 등의 재원 등도 있었고 기타 방대한 이론이 나왔다. 그런데 군사과목은 대학의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도 과락 없이 모두 급제하였다.

이제는 실기평가였다. 실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추운 바깥에서 할 수 없어서 체육관내에서 개별평가를 받았다. 화기학에서 M1, Car. 분해·결합, 독도법, 태권도, 국군도수체조 등 과목의 실기를 평가하였다. 용케 모두 실기 평가도 통과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의전행사인 임관식任官式만 남았다. 임관식에는 5관구사령부 사령관 소장 정순민 장군이 임석관이었다.

 방학 중이었지만 RNTC임관식에 참석하여야만 제대증을 받을 수 있기에 모두가 전날에 군복과 모자, 군화를 인수 받았다. 계급장과 명찰은 개인이 준비를 하여 달아야 했다. 문제는 인수받은 군복이 나에게는 너무 컸다. 나의 몸피는 작은 데 군복은 제일 큰 군복이라서 이것을 입고 임관식에 도저히 참가할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바로 양복점에 찾아갔다. 내 몸에 맞게 치수를 재고, 줄였다. 군복은 밤에 찾기로 하고, 계급장과 명찰 새기러 대구역전까지 찾아 갔다. 아니 단 몇 분이라도 갖출 것은 모두 갖추어야만 했다. 용케도 시간을 맞춰서 군복을 줄일 수 있었고, 계급장과 명찰을 다니 훨씬 군인다운 복색을 갖출 수 있었다.

 마침내 1972년 2월 20일 날이 밝았다. 임관식은 오전 11시이었다.

 모두가 방학이라서 그런지 훈련 받을 때 보다는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 바로 행동이 느려 보였다. 우리대학 제208학군단 교관과 조교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방학 중이었고, 모두가 1973년 3월 1일자로 교사발령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제4기 RNTC하사관후보생들의 임관식만 마치기를 바랐다. 가장 큰 문제가 곧 3월 1일부터 교사 발령을 받고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아니하고 장발로 왔다. 이것이 문제이었다.

 11시가 되자 임관식이 시작되었다. 임관식장에는 5관구에서 군악대도 왔고, 식장을 거나하게 꾸며 놓았다. 커다란 고딕체로 “慶 제208학군단 제4기 RNTC하사관무관후보생 임관식 祝”이라 씌어 있었다. 물론 5관구 사령관 소장 정순민장군도 참석하였다. 마침내 임관식 팡파르가 울리고 의전 절차에 따라 국민의례가 있었고, 이어서 사령관인 임석관이 사열하면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임관하려는 160여 명의 RNTC하사관후보생들의 모자부터 문제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장발로 한 것까지도 눈에 걸리는데 하물며 모자를 찢어서 머리 위에 그냥 얹혀 있는 것을 보고서 사열을 그만 중단하고 말았다.

 임관하려는 후보생들 전원은 이발하여 다시 임관식을 오후 3시에 한다는 것만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학군단장님 이하 교관들이 허망해 하였다. 여태껏 RNTC무관후보생들 임관식을 하면서도 처음이라고 하였다. 오후 3시가 되어도 5관구 사령관은 오지 않았고, RNTC무관후보생 들은 아무도 이발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기어이 임관식이 이렇게 끝나 버리려나, 참석하신 학부모님과 친지들로서 기념사진만 촬영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졸업식은 이미 15일에 하였고, 졸업식 날 480명이 운동장에 모였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니 그런데 1학년 때 대구에 처음 올라 와서 우리 동네 후배 집에 함께 살았던 초교 후배가 나타났다.

커다란 앨범 한권을 사 들고 왔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눈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대구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초교 후배가 찾아왔다. 졸업식은 있었는지도 몰랐고, 임관식은 작업장에 우연히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통하여 알게 되어 찾아 왔다고 하였다. 정말 고마웠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학군단 사무실 늦은 시간에 공고가 한 장 붙었다. 가져간 군복 등을 반납하고 제대증을 찾아 가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임관식은 새로 하지를 못하고, 그렇게 끝나 버렸던 것이다.

 나는 제대증을 찾고 나왔다. 정말로 제4기 RNTC무관후보생 임관식이 그래 흐지부지로 끝나 버렸다.󰃁

(푸른 숲/20100-20130711.)

▲ 1972년 2월 20일 11시 임관식에서.

(대한민국 육군 하사 84005262번)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