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

[스크랩] (푸른 숲 제7 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27.촛불 술집

신작수필

27. 촛불 술집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대학에 행정직으로 근무하면서 자꾸 술 먹는 기회가 넘쳐 났다. 당시는 젊고 밤새워 마셔도 이튿날 제일 먼저 일어나 근무지로 일찍 출근하였다. 정말 술이 사람들 사는 조직 속에서는 하루라도 떠날 수가 없는 것처럼 그때는 느껴졌다. 사실 매일 어떤 핑계라도 대고 술을 마시게 되었으니 아무도 자기 스스로 빨리 죽으려는 최고의 수단이 되는 줄은 몰랐다.

 조직 속 교수 중에도 술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자꾸 늘어나게 되었고, 직원은 숫자가 적은 가운데서도 결국 술병으로 돌아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죽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술집에 출석을 하고 만다. 마치 결석하면 안 되는 줄 아는 학생처럼 말이다.

지나고 보니 아마도 악마의 유혹이 아니었는가 싶다. 스스로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탈피하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새카만 얼굴을 하면서도 분명히 술병이 있는데도 술을 자꾸 들이키니까. 마치 어제 먹었던 술이 정말 양약인 줄 알고 매일 그런 방법으로 연장하려는 심산이 다 내다보이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고쳐지지 아니하였다.

 어떻게 보면 인간만치 모험을 좋아하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흔히 술을 마시면서도 ‘네가 죽지, 내가 죽겠느냐?’하는 무슨 그런 엄청난 오기와 자만을 부린단 말인가? 결코 장주(長酒)나 폭주(暴酒)하는 것이 건강에 해로운 줄 너무나 당당이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하기는 평생에 술 한 모금도 안 먹었던 분이 암으로 홀연히 돌연사하는 것도 보았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말려도 오늘도 특별한 술집을 간다고 선포를 하여서 야간수업을 또 빼먹어야만 하였다. 어찌 대구에 술집이 희한한 데가 그렇게도 많은가 말이다.

 오후 6시 반이 되자 주임이 들어 와서는 사무 보던 것을 빨리 거두고 여직원은 퇴근하라고 하였다. 남자 셋과 나는 야간수업 가방을 든 채로 학교는 가지 않고, 곧장 술집으로 간다고 택시를 서쪽 정문에서 또 잡아탔다. 마치 4인방이 무슨 큰일을 낼 듯이 말이다.

 1981년만 해도 북구 검단동은 개발도 안 되었고, 도로 포장도 안 된 도시농촌이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곳이었다. 이런 곳으로 하필 왜 찾아 가는가? 도시 밝은 전깃불 밑에 화려한 조명을 받는 그런 술집도 많은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알고 보니 요즘 복현 오거리 어디쯤이었다. 비포장이라고 택시도 안 들어간단다. 입구에서 내렸다. 네 사람이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으로 주임의 안내를 따라 나섰는데,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비포장에 구두를 신고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데 돌부리에 차이고 귀뚜라미 우는 컴컴한 수풀 속으로 자꾸 깊게, 깊게만 들어간다. 도시 이런 곳에다가 술집을 만들어 두고, 누가 이런 곳에 또 술 먹으러 온단 말인가? 택시도 안 들어가는 도시술집, 전깃불도 없는 도시술집이다. 자꾸 걸어 들어간다.

 드디어 도착하였다. 도대체 술집이라는 데가 불빛이라곤 안 보인다. 찾아 들어간 곳에 조그만 촛불 하나가 화톳불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우리 기척에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안녕하세요?”

“예. 어서 오이소.”

“술 한 잔 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방에 들어 가이소.”

 일행 넷은 촛불 하나 켜둔 방에 들어갔다. 하하하. 정말 캄캄하고, 기이하다. 이런 도시에 이런 촛불 켠 술집으로 찾아오다니. 이제까지 전깃불 밑에서 전깃불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는데 촛불 한 개 켠 방에 앉아 보니, 시골 나의 고향 토방이 생각난다. 그때는 촛불도 돈이 든다고 남폿불로 켜고 살았다. 밤새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시커멓게 되던 그 때다.

 방 안에는 옛날 이불이 하나를 동그마니 개어서 시렁에 얹혀 있고, 누룩이 보기 좋게 누워 띄우고 있고, 마대포대기에 쌀이 반쯤 담겨서 아가리 부분을 쭈그려서 그대로 묶이었다. 천장에는 연목이 고스란히 보이는 초지(草紙)도 붙이지 않은 황토가 발린 그런 시골 초가였다. 벽에는 신문지가 발린 것이 전부다. 그래도 동쪽 벽 대들보 아래에는 직사각형의 액자 하나가 있어서 회갑 때 찍은 사진이며, 자식들 얼굴이 소복이 모여 들어 갇혀있었다.

 마침내 주인 할머니께서 전 부치고, 찌그러진 주전자에 동동주와 흰 사발 네 개와 젓가락 네 짝, 김치를 얹어 부엌에서 들고 들어온다.

 술과 전과 김치를 먹어 보아야 했다. 맛이 살아났다. 참 맛있었다. 그 옛날 외가에서 먹었던 그런 음식 맛이었다. 비포장도로를 걸어 들어 와서 무척 배고팠는데 무엇이든 맛이 없겠는가.

주임은 이런 맛 때문에 비포장도로라도 찾아 가자는 것이었을까? 전을 먹고 더 시키고, 김치를 먹고 더 시키고, 넷이서 배고픈 것으로 또, 술은 붓고 마시고, 붓고 마시고 동동주를 항아리 째 다 부어서 먹어 치웠다.

 하하하. 대구에서 촛불 켜고 술 마시는 정취(情趣)도 그날 그때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

(푸른 숲/20100-20130428.)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