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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

[스크랩] (푸른 숲 제7 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26.게이 술집

신작수필

26. 게이 술집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시골 한가하게 교사하면서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도시로 이동해 와서 술이라는 술을 모두 섭렵하고 살아가게 되다니 참 변해도 많이 변했다.

 대학에서 행정 하는 일이 그렇다. 내가 하는 일은 입시 관련 자료를 기획하고 만들고, 전국으로 지원하여 오는 고등학교를 조사하고, 다음 해에 입학자원 확보를 위한 데이트 분석과 함께, 특히 대구·경북에 소재하는 지역 고등학교를 지리적 위치부터, 학교 규모, 대학에서의 거리 등을 조사하여야 한다. 모두가 다음 해의 신입생 확보를 위한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부수적으로 합격한 신입생들의 개인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다음 계(係)로 넘겨주는 일을 하고, 각종 자격취득(실기교사, 당시 양호교사 등)관련 업무와, 월마다 업무가 계획되고 월마다 실적을 정리하고 조금씩, 조금씩 그날을 연장하여 1년이 되는 것이다.

 2학기가 되면 9월부터는 당장 홍보자료 책자 발간을 위한 사진촬영과 필름 취사선택, 편집, 인쇄, 배부계획 등이 있었고, 입학요강 작성 및 인쇄의 업무 등으로 쏟아진다. 다른 계(係)의 수업업무도 수시로 지원하여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구(烏口)로 줄긋고, 칸칸이 과목명과 강의실명, 지도 교수명(敎授名)을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펜촉으로 들고 잉크를 찍어 가면서 나누어 쓴다. 나의 야간수업도 자꾸 불어난다.

 시골 초등학교에 근무 할 때는 최고 교사 수가 35명도 같이 있어 보았지만 1980년대 초에 근무 할 때 전국전문대학에서 표준대학이었는데, 정교수 90여명에 시간강사 200여명, 기능직을 포함하여 직원이 50여명이었으니 아니 갑자기 매머드 조직에서 이름 외우기도 바빴다.

 처음 근무 하던 날 교무실에서 인사하고, 또 교수실에서 만나 악수 하려니, ‘아까 교무실에서 봤잖아요?’라 해서 잘 알아보지 못함이 송구스러웠던 것이다.

 학과 이름도 “기금자전전전화섬토건경식응가의간”이라고 외웠던 기억이 지금도 외우고 만다. 기계과, 금속과, 자동차과, 전자과, 전자계산기과, 전기과, 화공과. 섬유과, 토목과, 건축과, 경영과, 식품영양과, 응용미술과, 가정과, 의상과, 간호과 등 순서다.

또 당시는 전화를 모두 교환원이 교환하여 주어서 학과 연락 한번 전부하고 나면, 시골에서만 살다가 숙달이 안 되어 나의 귀가 먹먹하였다. 종일 이렇게 응대하고 살아가려니까 무척 피곤하였다.

 토요일이면 일찍 퇴근도 못하고 숙직실에서 선배들이 어울려 화투 치는 것을 구경하다가(사실 난 화투를 치지 않았다. 발령받은 이튿날 딱 하루치고 당시 돈 7,000원을 잃어버리고는 다시 화투를 치지 아니 하였다.) 늦은 시간 배고파 오는 시간에 술 먹으러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선배를 따라 봉산동에 희한한 술집으로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무엇이 희한하며, 왜 비싼 돈 주고 술집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를 그때는 잘 모르고 있을 때이었다. 술집으로 가자면 따라가고, 돈 내라면 돈 내고, 똑같이 나누자면 나누고 그렇게 살았던 때이었다.

당시까지도 대구 시내의 술집 골목마다를 잘 모르던 때 이었다. 화보책자 인쇄관련으로 봉산동 인쇄골목 쪽으로 와본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당시만 하여도 그 술집이 잘 나가는 술집이었다. 희한한 것이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이름이 뭐였든가? 바로“피닉스(Phoenix)”이었다. 피닉스는 불사조(不死鳥)가 아니던가? 죽지 아니하는 새라니 나는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갔다.

 물론 술집이 다른 집하고 조금 달랐다. 가운데를 두고 무대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공연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었다. 자리에 앉자 말자 아예 맥주상자 채로 술이 배달되었고, 마른안주, 과일 안주가 나왔다. 그때부터 놀랐다. 팔등신이 아닌 구등신 아가씨들이 그 무대로 올라가서 쇼를 하는 것이었다. 미리 와 보았던 선배가 말했다.

“L선생! 저 사람 아가씨가 아니다. 남자들이데.”

“예? 가슴이 많이 부푼대 도요?”

“그래. 남자 라요.”

 정말 그랬다. 이제는 손님 곁으로 와서 자꾸 손을 끌고 가서 자기 유방을 만지라는 것이었다. 손이 오그라져서 나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팁만 오천 원을 주고 말았다.

 저 건너편 좌석에 우리 학교 모 학과 교수들이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알아보고 웨이터를 시켜 맥주 다섯 병을 보냈다. 아니 도시에서는 이렇게도 하는 구나를 느끼면서 붉은 맥주병 맥주를 자꾸 마셔댔다. 술이 술로서 술술 잘 넘어가니 술을 자꾸 마실 수밖에. 술과 무슨 원수라도 졌느냐? 그렇게 퍼 마셔 대다니. 잔과 잔을 부딪쳐서 건배를 외치면서 밤이 낮의 일하는 만큼 열심히도 술을 마신다. 느는 것은 붉은 색 빈 병만 늘어난다.

 조금 지나 우리도 맥주 열병을 교수 쪽으로 보내 드렸다. ‘되로 받고, 말로 갚은 것.’이었다. 이제는 아예 맥주병을 들고 우리 자리로 와서 함께 잔을 기울였다. 정말 도시에서 술 인심이 되게도 좋아 보였다. 그것도 게이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마치 우리가 게이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

(푸른 숲/20100-20130427.)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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