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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

[스크랩] (푸른 숲 제7 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5.세상은 이태백이다

신작수필

5. 세상은 이태백이다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내가 처음부터 술을 못 먹은 것이 아닌가 보다. 1971년 대학 1학년 때 추석 전날 대취(大醉)하고 만 것이 나의 술 먹는 역사의 시작이다.

 대학 교복을 입고 우쭐한 마음에 고향에서 친구를 만났다. 당시 관광지 경주에는 아스팔트를 새로 하여서 도로로 걸어가기가 무척 좋았다. 도로 양편으로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만들어 우리를 환영해 주고, 매미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울어 준다. 물론 도로에 자동차가 다니지만, 당시는 가물에 콩 나듯 다니니 사람들이 다니기에 좋은 길이었다.

 길가 술집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고 또 다음 장소로 이동하여 가면서 친구들과 담소하는 것, 모르는 것 없이 세상 다 안다는 듯이 떠들면서 신나 하면서 걸었다. 도로 가에는 자양분 없는 모래에 앙증맞게 핀 살사리꽃(코스모스)이 우리들에게 손짓을 해 주고, 조용히 조심해서 다니라고 일러 주는 듯 하는 데 고마움도 좋은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아니할 뿐이다.

 낮부터 마신 막걸리에 취기가 오르면서 세상천지가 내 세상으로 보였다. 몸에 걸친 대학교복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술집이란 술집마다 들러 마시고서는 그렇게 자꾸 아스팔트 길 위로 걸어가고 떠들고 담소하고 허공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마치 시골 촌놈이 도시로 가서 갑자기 신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집으로 내려가는 길을 지나서 또 다른 술집에 들러 이제는 외동(外東) 쪽으로 나가도 아무렇지 않게 따라 다녔다. 막걸리를 차례로 사 마셔 가면서 말이다.

“그래 사회라는 것이 말이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살지?”

“우리야 어찌 하겠나? 배운 것도 없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논밭에서 농사지어야지.”

“그래 말이지, 사회라는 것이 말이지, 우리를 버리고 있지…….”

“와? 벌써 네 이야기가 떨어졌나?”

“아니, 그것이 말이지. 세상의 삶이 형이상학(形而上學)도 있고, 그렇지. 반대로 형이하학(形而下學)도 있지.”

“그게 무슨 말이고? 우리는 모르겠다. 너 혼자 자꾸 말을 하니 우리는 모르겠다 아이가.”

“그래. 그렇지. 내 혼자 자꾸 이야기 했네.”

“우리는 뭐하고 살아야 하나?”

“그래. 사는 것 정말 어렵지. 나도 아르바이트 하면서 살지.”

“아르바이트가 뭔데?”

“내가 돈이 없어서 돈 벌어 가면서 대학 다니지.”

“그래. 너 정말 힘들겠다. 우리는 대학 다니면 다 좋은 줄만 알았는데…….”

“그래. 부잣집 아이들은 돈 마음대로 쓰고, 연애도 하고, 대학에서 높은 이론도 구사하며 그렇게 살 수가 있지.”

“그래. 너도 힘들겠네.”

“응. 우리 지금 어디까지 왔지?”

“응, 그래. 연안(淵安)까지 와 버렸네. 저기 가서 막걸리 한 잔 더 하고 집으로 갈까?”

“그래. 이제 다리도 아프네.”

우리 넷 친구는 초교 동기로 오랜만에 만나서 추석 전일에 기분 좋게 막걸리로 친구를 알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친구야! 대학 다니는 친구야! 그래도 너는 좋겠다.”

“우리는 학교도 못가고, 서당도 안 다녔고, 세상천지 이래 무지렁이로 살아 안 가나?”

“무지렁이! 그 말 참 오랜만에 들어 보네. 그래 너희들도 좀 배워라. 무지렁이 면하려면…….”

“우린들 왜 안 배우고 쉽겠나마는 사실 나는 공부도 싫고, 공부할 돈도 없다 아이가. 또 형제도 많고 우에 공부한다 말이고. 그냥 일하고 살지 뭐.”

“하하하……. 그래 일하고 살면 되지.”

“세상은 술 먹는 이태백이다. 태백이는 술을 먹고 채석강에 빠진 달을 건지려다가 죽었지. 술, 오늘 먹어 보니 세상이 뱅글뱅글 도네. 술, 정말 이태백이다. 우리 척간에 이태백이도 정말 있단다.”

 다시 조금 더 걸어서 입실(入室)까지 갔다가 마침내 돌아 올 때는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누가 그렇게 걸어 다니라고 아무도 명령이 없었는데 고향에 와서 오랜만에 죽마고우를 만나 새카만 아스팔트 길 위에 환영해 주는 살사리꽃 만나고, 시원한 플라타너스 그림자를 밟으며 친구를 만난 김에 낮부터 술 마시고, 술 먹는 이태백이가 되고 말았다. 혈기 방장한 젊은이로 사회에 살아가는 흥취를 고향에서 만끽한 일뿐이다. 술도 옳게 먹을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

(푸른 숲/20100-20130406.)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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