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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63)취송당 찾기

신작수필

63. 취송당(翠松堂) 찾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내 고향 뒷동산에는”제목으로 줄곧 글을 써 왔다. 물론 부 단위로 그 내용을 묶어서 되도록이면 고향 냄새가 나는 제목으로 골라 글을 써 보았다. 이는 수필가라는 닉네임을 얻고서 꼭 이루고 싶었던 일들로 부지런히 쓰고 발표도 해 보고 관심도 받아 보았다.

나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초교 입학 전부터 서당이라는 전근대적 학습방법으로 배워 보았다. 그래도 겨우 천자문 중에서 1/4인 지킬 수(守)자까지 붓 들고 배우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물렁한 붓보다 딱딱하지만 연필로 글쓰기가 훨씬 쉬었다. 어쩌다가 아버지 철학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말자 중학교를 보내 주지 아니하여 다시 서당으로 가서 많은 종류의 한문책으로 공부를 2년간 하였다.

 정말 한문 공부는 재미가 나지 않았다. 동기들은 교복입고 모자 쓰고 배지 달고 책가방 들고 중학교 다니는데 나는 헐벗은 옷으로 서당에 하루 15분이면 끝나는 것을 공부랍시고 하고서는 풀 베고, 소 먹이고, 나무하는 시골머슴과 똑같이 일을 하였다.

한문을 서당에서 배우는 동안 강의록을 구입하여 중학교공부를 해보니 무척 재미났다. 특히 영어를 독학으로 배웠는데, 고불고불한 글씨하며, 혀도 잘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발음기호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비록 더듬거렸지만 중학교공부가 너무 재미나서 강의록으로 중3과정을 2년 동안에 모두 배워 버렸다.

 초교동기를 통하여 출사표를 하였다. 중학교를 다시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중학교 1학년으로 동급생 집에 아르바이트로 돈 벌어 내 공부를 하였다. 정말 공부가 재미났다. 지역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코피 흘리면서도 아르바이트해서 학자금을 모아 내 힘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문제는 2년간 놀았기(? 서당 다니고 강의록 공부)에 고등학교 3학년 때 군대 신체검사를 받았고, 졸업하자 말자 군대영장이 나와 있었다. 나의 인생에서 기로에 놓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미 아버지 연세 많으시고, 어머니도 그랬다. 돈도 없었다. 선한 것이 교육대학이었다. 교육대학에 들어가면 군대 훈련도 받아 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교육대학을 입학하였고, 교사가 되면 열 번째 막내로서 먹고 사는 것도 해결이 될 수 있었다. 1년 벌어 결혼하였다.

 아들 둘 낳고 공부에 뜻이 있어 대학교에 편입하였고, 교사를 사표 내고 말았다. 대학교를 마친 김에 대학원에 들어갔고 졸업하자말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배운 죄(?)로 석비하고 선조문헌 찾기에 평생 투자하는 것으로 정하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까운 조상부터 모시고 시작한다는 뜻으로 증조·증조모이하 모든 산소를 묶을 수 있는 “취송당(翠松堂) 비명서안(書案)”을 작성하였다.

 

車城李氏 護軍公派 慶淵公 曼瑚門中

 

 

翠 松 堂 碑 銘

 

 

이곳은 車城李氏 護軍公派 慶淵公 後裔인 曼瑚門中의 翠松

 

堂이다. 여기에 모신 분은 入鄕祖이신 37世 翠松 諱慶淵과

 

妣翠松堂夫人 烏川鄭氏, 38世 曼瑚學行 諱膺祚와 妣慶州金

 

氏, 39世 松明居士 諱壽祥과 妣松溪堂夫人 慶州崔氏, 40世

 

諱正伯과 妣慶州崔氏, 諱成伯, 諱平伯 등 4代의 考位와 妣

 

位이다. 後孫들의 世居地인 이곳 時來洞에 터 잡아 한 자리

 

에 모셨다. 幽宅을 이곳에 모아 山川草木과 함께 時俗과 子

 

孫들의 衆議에 따라서 우선 위의 4代 考․妣位를 모시고 앞

 

으로 子孫들의 身後之地로도 삼고자 하노니, 生前死後를

 

通하여 한결같이 어버이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기

 

쁜 일이며, 이곳을 參拜하는 後孫들 또한 한자리에 會同함

 

으로써 한 어버이의 핏줄임을 새삼 깨우치는 契機가 될 것

 

이니 祖上님네의 魂靈도 또한 흐뭇해하시지 않으시랴. 이

 

제 이 翠松堂은 우리門中의 聖域이 될 것이라. 이곳을 찾아

 

敬拜를 올리는 子孫들에게 간곡히 밝히니 뿌리가 깊은 나

 

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며, 根

 

源이 먼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서 시내를 이루어 바다

 

에 到達한다 하였나니, 祖上님네가 守分修德 하시어 물려

 

주신 名譽로운 家風을 이어 받아 由緖 깊은 우리家門에 永

 

遠히 빛을 더하게 하라.

 

西紀 20 年 月 日

 

이 翠松堂을 마련하는 趣旨를 後孫들의

 

請에따라 감히 靑林 泳伯은 記錄하였다.

 

 증조, 증조모 이하 모두 10기를 묶어서 취송당으로 명명하고 일괄 관리를 위해 이런 방법을 원용한 것뿐이다.

 

차성이씨 37世 경연(慶淵)

1834년甲午 1월 9일생∼1898년戊戌 11월 2일졸(65歲)

묘 경북 경주시 구정리 허영곡에서 밀개산으로 이장하였다가 이후 화장 함. 경북 경주시 시래동 밀개산에 유허비 건립.

배 오천정씨 운경(雲慶)녀

1836년丙申 9월 29일생∼1907년丁未 4월 13일졸(72歲)

묘 화장. 경북 경주시 시래동 밀개산 유허비 동시 건립함.

 

 내가 확인한 내용 중에 증조부는 생부가 따로 있었다. 바로 생부(生父)는 화범(和範)으로 고조(高祖, 차성이씨 36世 和浩)께서 무후(無后)인지라 양으로 오셨던 것이다. 우리 집안은 이렇게 양으로 오셔서 큰집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35세 동보-> 36세 화호-> 37세 경연(生父 和範)->38세 응조->39세 규상(伯父)-수상(父)-부상(叔父)-40세 英伯-正伯-成伯-平伯-源伯-泳伯-章伯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체계를 세울 뿐이다. 뿌리는 누구든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문헌과 체계로 알게 되고 말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잃어버린 문헌을 찾아서 그 가계도인 세계도(世系圖)를 완성한 것은 자기 뿌리의 체계인 것이다. 결코 자랑도 아니요, 보탬도 아닌 사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자료이니 만치 이를 밝혀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는 외어서 시험 치는 것도 아니요, 후손으로서 자기뿌리를 자기가 정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것으로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버킷리스트』가 요즘 유행을 한다. 25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⑬ 내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유산 만들기”에서 바로 우리 선조 세계도(世系圖)를 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다. 그래야 나처럼 낯 뜨거운 자기 조상도 모르는 후한무치가 안 되려고 말이다. 이런 생각에 오늘도 가장 가까운 선대 조상을 모아 둔 이곳 취송당(翠松堂)에 들린다. 󰃁

(푸른 숲/20100-20130329.)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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