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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61)선대 비문짓기

신작수필

61. 선대 비문짓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집집마다 자기 가계를 세우는 일이 남자로서는 매우 중요하다. 나의 한미한 집안으로 인하여 가문을 승계해야할 의무에서 매우 힘이 들었다. 아버지 평소 말씀이 가문(家門)을 세워라. 나의 무덤에 석비(石碑)를 세워 달라. 이를 어째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었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배운 바가 짧아 아무도 석비를 하려고 마음 내지를 못하였다.

 비록 내가 초교교사를 하다가 한문서당에 다닌 것으로 인하여 공부에 뜻이 있어 대학교를 편입하고 대학원을 국어국문학으로 전공하였기에 우리 형제들이 명절에 모이기만 하면 아버지 석비 건립을 거론하였다.

 그래. 내가 걸머지자. 내밖에 할 수가 없다. 때마침 넷째 형님께서 풍수지리를 배워서 석비 하는 공역을 많이 알게 되었고, 백형은 본래 서당에서 한시까지 지어 보았기에 향교출입으로 석비에 자신을 보였다, 나는 배운 글로 석비문안과 제자(題字)받기를 결심이 섰다. 자금은 우리 오형제가 고루 분배하기로 하고 특히 넷째 형님이 돈을 좀 벌었기로 산소로 올라가는 길을 닦고, 계단석을 싣고 오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석비만 할 수 없어서 할아버지 석비를 겸하기로 하고 종백씨 한분과 우리 여섯 집안이 뜻을 모아 함께 하도록 뜻을 모았다.

 문제는 내가 바빠졌다. 할아버지 비 문안과 아버지 비 문안을 준비하여야 했다. 그것도 대학원 논문 쓰는 학기에 걸쳐서 이중 고통이 되었다.

 비 문안 쓰는 요령을 먼저 터득하여야 하였다. 남의 비 문안을 먼저 찾아보고 모방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비 문안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바로 모방이 창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 문안을 작성한다는 것에는 첫 문장이 중요하였다. 먼저 할아버지 비 문안 초를 내가 작성하였다. 먼저 원칙은 명사만 한자로 사용하고 조사는 모두 한글로 쓰며,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曼瑚學行車城李公諱膺祚之碑(案)

 여기現在가있고過去가있었고未來가있기에公의表文지어남기고자한다公의祖

 上이時來洞에代代로世居한지二百年이지났어도碑碣함은비록晩時이고事行經

 歷이隱微하나世系를敍述하여千秋子孫에게試金石이되고자함이다∼

 

 이 한 줄을 결정하는데 한 달이 걸리고 말았다. 그다음부터는 쉬었다. 공에 대한 소개와 본관, 시조이하 선대를 서술하고, 조부모를 밝히고, 공의 개인사를 적고, 연치와 돌아가신 해, 장소를 기록하였다. 배(配)에 대한 소개와 이후 자손들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비문은 전면에 제자를 크게 새기고, 우측면부터 후면까지 서술하고 좌측면에는 본래 시부(詩賦)로 요약된 내용을 서술하여야 했다. 바로 여기에 막히고 말았다.

 근무처이었던 대학에 교양교수를 찾았다. 마침 시인(詩人)이었고 국문학자이었기에 교열을 당부하였다. 내가 작성한 초안을 드리고 이에 대한 시부를 부탁해 올렸다.

정말 시인다웠다. 운에 맞아 떨어지도록 가장 알맞게 잘 지어 주셨다.

曼瑚公의淸白한孝節그간의歲月속에쌓여大德이連綿해왔으니

오늘에야新羅의숨소리깃든이곳密開山아래後孫의우러러는뜻을모아이돌을세우니

爾後風雨속에서돌은삭을지라도子子孫孫의追慕속에公의큰뜻이메아리치며永遠하리라

 

 제자는 당시 매일신문사에서 한문 서예를 하시는 서정×옹께 당부하여 예서로 받았다.

아버지 비 문안으로 불초 감히 감히 작성하였다.

松明居士車城李公諱壽祥之碑(案)

 萬物은가만있고자하여도제位置를지키지못하며變하지않고자하여도變하며없

 애버리려하여도지워지지않음이라여기公의行蹟이人口에膾炙될것이없으나敢

 히남기고자함은心中에지울수없던事實이었으므삼가製述碑碣한다∼

 

 이 문장을 쓰는 데도 몸살이 나고 말았다. 넷째형님은 이 글 짓는 것이 밥하듯이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어서 한편 매우 섭섭하였다. 종이에 적어 두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써서 돌에 새기면 지울 수 없는 글을 그렇게 쉽게 쓸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든의長壽와아홉男妹의榮潤함이하늘주신것으로어찌偶然한일이오며

車城李門敦宗敦睦佛國寺에서發論됨이人意로다한精誠公의忠孝誠符書로다

이후密開山巖과水의靈氣받아松明居士松磎堂夫人의넋을千秋에누리오리다


 이를 완성하고 마침내 비 제막과 고유제로 시행하고 이어서 파조비문까지 내가 쓰게 되었다.

 

車城李氏護軍公派祖

諱善基公之碑 文案

朝鮮折衝將軍副護軍

 新羅의歷史는꿈같이흘러갔건만東岳옛터에는돌한덩어리草木한떨기마다祖上

 의溫氣가배어있고이곳에祝福받은子孫들이屢代로그傳統과그文化를이어내려

 온우리로서어찌잊어버리고있으랴∼

 

 비 문안은 쓰고 보면 쉽지만 이글을 짓기까지는 사람의 피를 말리는 작업이 되고 만다. 정말 겁도 없이 짧은 지식으로 마구 글을 쏟아내고 말았다.

吐含山아래山幽棲를提供하니구름은松林을抱擁하고달은시냇물을어루도다

將軍을懷古컨대千年保護가어렵지아니하며東方의眞理가公에게서부터비롯되도다

轍環天下할때天意가들렸으니드디어玄武로하여금佛國寺에서이루게되었도다

 

 쓰고 읽어보니 쉬운데 이 글을 쓰려고 그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으며 머리를 짜내는 작업을 하였던가? 비 문안을 빨리 안 쓴다고 척간들에게 욕까지 얻어먹으면서 글 배운 죄(?)로 애매함까지 매도당하면서‘이어 내려온 우리로서 어찌 잊어버리고 있으랴!’라는 강하게 주어지는 자손의 의무에서 글을 남겼다. 글이 안 써지고 할 때는 단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조의 비 문안을 쓴다는 것은 후손으로서는 심각한 고문(拷問)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 그리도 모진 소리 들어가면서까지 글을 쓰고 앉아 있었는가는 나로서도 스스로 이상함을 느낀다. 오로지 후손으로 태어나서 내 돈 내고 배운 죄(?)밖에 없다는 솔직한 심정을 밝힐 뿐이다.

 나는 학위 논문을 쓰고 마음의 여유도 없이 1년 동안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면서 이제 홀가분하게 오랜만에 파조비문을 더듬거려 낭독하고 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고향에 들러 조부모, 부모 앞 석비(石碑)에 새긴 한 글자 한 글자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희망할 뿐이다. 󰃁

(푸른 숲/20100-20130327.)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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