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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56)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많은 고향의 기억

신작수필

56.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많은 고향의 기억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나는 어쩌다가 시골에 태어났음에도 직장 따라, 결혼 따라 이제 도시에 머물러 있다. 지난 세월은 이다지도 생생하고, 아직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데 살아온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많은 고향의 기억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아니한다.

 어린 날 꿈꾸다 한줄기 오줌 누고 시원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오줌을 싸 버린 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불에 우리나라 지도 그리고, 기어이 발각(?)되어 키 덮어 쓰고 소금 꾸러 나갔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시키니까 키를 쓰고 정말로 소금을 꾸러 갔지. 소금은 조금 주고 키를 탁탁 치면서 그 부끄러움을 동네에 알리는 시간이 되어 돌아오니 창피한 줄을 나중에야 알았다. 또 우리 집에 소금 두고서 왜 남의 집 소금을 꾸러 가라 하는지를 둔탁한 머리로 나중에 알았다.

 나는 초교 5학년 때 부반장을 처음 하였고, 6학년에 역시 부반장을 하였는데, 반장하던 아이가 개명한 집이라 3월 말에 갑자기 대구로 전학 가는 바람에 나는 저절로 부반장에서 반장이 되었고, 3반 반장으로 전교 어린이회 회장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차점획득으로 부회장이 되었다. 윗저고리를 형님 것 줄여서 입었는데, 와이셔츠를 줄이면서 어머니 바느질 기술이 부족하여 등판에 다른 천을 대고 기워서 얼른 보면 마치 숫자 1처럼 보이었다. 친구가 하는 말이 ‘네 등에도 반장 할라고 1자 숫자 붙여 두었네.’하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 말이 떨어진 옷을 입었다고 놀린 것일 줄이야.

 친구 따라 강남가면서 일요일에 칡 캔다고 도시락과 괭이 하나 달랑 들고 만호봉(曼瑚峯)에 올라갔다가 칡 캐기가 그리 어려운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다. 비탈길에 올라 괭이로 산흙을 파다가 굴러 떨어져서 꼭 죽는 줄만 알았다. 캔 칡을 내가 먹기가 아까웠다. 내 목숨과 바꿀 뻔 했던 그 칡을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 구루마 새로 맞춰 구입해 오던 날 미리 동해남부선 기찻길까지 나가 기다렸다가 황소 등에 길마 걸어 타고서 중머슴 채찍 때릴 때 맞는 황소를 보고 내 마음이 아팠다. 그 무거운 새 구루마를 끌고 오는 것도 힘들 텐데 채찍까지 맞아야 하다니. 비록 그 황소가 내 코를 박살낸 황소일지라도 말 못하는 짐승을 때린다는 것이 그렇게 어린 나의 마음이 아파 왔다. 마치 내가 그 채찍으로 맞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구루마 뒤에 따라 왔다.

 어린 날 추억이 하나하나 질겅질겅 씹이듯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은 마치 내가 살아온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많은 고향의 기억이 편린으로나마 나의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해(旱害)가 오면서 천수답 논바닥마다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틈은 내 마음이 터 갈라지듯이 아파왔다. 한해를 극복하려고 밤새껏 반티로 물 퍼 올렸던 지난날들은 무서운 줄도 몰랐다. 납닥발이가 옆에 온 줄도 모르고 꼬박 밤새워 물을 퍼 올려야만 했던 그 시절이 생경스럽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 추석 전날부터 비오고 바람 불어 아침에 홍수 져서 우리 동네, 시래 남천(南川) 하천 둑이 무너졌다. 삭부리 집 지붕 위에 황영감이 얹혀 떠내려가던 것을 훤히 두 눈으로 보고서는 기가 막혀 버렸다. 그래도 사람 목숨 귀중하지, 황영감은 아랫동네에서 밧줄 던져 생명만은 구했다.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상행선, 하행선 기차가 잘도 다니던 편리한 시절 왼고개 기적소리가 어찌 그리도 울려 댔던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하도 시끄러워 전교생이 모두 시래 철교로 뛰어 나갔다. 아니 세상이 이런 일이 있나? 기어이 어르신이 기찻길에서 떨어져 현장 즉사하여 버렸다. 우리가 찾아간 시간에 벌써 경찰이 먼저 와서 거적을 덮어 두었다. 단지 사람 핏자국은 선명히 남아 있었다. 어이타 철길로 가셨을까?

 지나간 내 인생의 삶이 영상자료실에서 한 통의 영상필름처럼 선명히 아직도 남아 있으니, 나도 참 기막히게 살아 온 것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홍수가 나면 17번국도 시래교(時來橋)가 끊어지고, 멀리 길 떠난 사람들 어쩔 수 없어 철길로 길 건너 부산으로 반대편 차 받아 타고 간다. 크레인이 와서 다리 연결 공사부터 한다. 나는 진흙 판에 단단히 고르고 낫으로 크레인 공사 장면 그림 그린다.

그 림 그리는 소질 있어서 5학년부터 전지에 괘도 그려 가져갔다. 아버지 이런 것을 보고 공부는 하지 않고 환칠만 한다고 꾸중하신다. 짬을 내어 저학년 교실 환경정리를 해 드리고 36색 앵무새크레파스 얻어 썼다. 나는 본시 키는 작았지만 공부를 관련하여 그림도 제법 그렸다. 미술시간이 즐거웠고 재빨리 그려서 칠판에 먼저 붙여지고 시범그림 역할을 하였다.

 여학생들이 철도관사인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해서 검은색 전화도 구경하였다. 나는 돈이 없어서 전과를 사지 못했는데 여자 친구 집에는 표준전과 모범전과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 전과를 이용하여 마음껏 공부하고, 문제도 풀어서 저절로 공부가 되었다.

 정말 쓸데없는 것을 기억하고 이제까지 살았다. 세월의 길이만큼 고향의 기억을 하고 산다. 󰃁

(푸른 숲/20100-20130322.)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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