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53)동지 팥죽

신작수필

53. 동지 팥죽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동지(冬至)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이 날이 지나면 하루 낮 길이가 1분씩 길어지는데 옛 사람들은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지를 ‘작은 설날(亞歲)’이라고 한다.

 동짓날이 되면 우리 동네 암자마다 분주하다. 제마다 동지에 복을 빈다는 것이다. 동지는 음력으로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는 중동지, 그믐에 들면 노동지라고 부른다. 이 때 애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어 먹지 않고 대신에 팥으로 시루떡을 해 먹기도 한다.

 팥죽을 쑤면 그 색깔이 붉어진다. 바로 팥 색이 붉은 것은 약한 기운을 방지하고, 생활 주변에서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귀신이 무서워하는 색이 붉은 색이라고 여긴다. 우리 조상들은 생활의 지혜로서 이를 이용한 것이다.

 동지가 되는 날에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달한다. 그러나 이날 이후부터는 양(陽)의 기운이 싹튼다. 동지는 태양이 죽음을 부활하는 날이다. 우리는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한 살 더 먹기 위해서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는다.

 우리 집에도 어머니께서 팥죽을 해 마다 쑤어 먹었다. 우선 맵쌀을 골라서 물에 불려 둔다. 또 팥을 고르는 작업을 한다. 팥은 둥근판에 부어두고 할 알 한 알 확인하여 고른다. 그러면 못 쓰는 팥, 껍데기 등 버릴 것들이 수북이 나온다. 이런 작업은 팥죽을 먹을 식구가 많을수록 그런 일들이 늘어난다. 식구 제마다 동짓날에 일을 거든다.

 물에 불린 쌀은 방앗간에 가져가서 곱게도 하얀 눈가루를 만들어 온다. 팥은 이미 불을 때어 삶아 두었다. 어머니는 벌써 하얀 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하기 시작한다. 모든 팥죽 쑬 감을 두고 새알을 준비한다.

 아버지도 오늘은 큰방에 앉으셔서 새알을 먹을 만큼 비비신다고 나선다. 형수님, 누이들도 둘러 앉아 새하얀 쌀가루 반죽으로 새알을 비빈다. 우리 집에 셋째형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웃음을 준다. 반죽된 쌀가루로 새알을 안 만들고 새와 고기를 만들었다. 좌중에 새알 비비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나이만큼 새알을 비벼야 하는데 어찌 그 새알의 굵기가 모두 다르고 아니면 조그만 새알이 되고 만다. ‘아이고 막내는 그래가는 새알 못 먹겠다.’나는 시무룩해지면서 슬그머니 새알 비비는 것을 중지하고 만다. 이미 큰 부엌 가마솥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불을 때고 있다. 방구들이 뜨끈뜨끈 덥히어 온다. 팥을 으깨고 밥쌀도 넣고 비빈 새알들이 붉디붉은 팥 색이 된 국물에 수영을 한다. 우두둑 쏟아 붓는 새알들이 금방 팥물 속으로 숨어 버린다. 부엌 아궁이에는 연거푸 장작더미로 불을 지핀다.

 온 동네 집집마다 중동지 팥죽을 쑨다. 집집이 굴뚝에서 흰 연기 피어오르고 복을 몰아 달라고 민심이 동분서주한다. 이래서 농촌에 사는 재미가 난다. 둘레둘레 척간이 함께 어울려 살고 무슨 일이 있어 슬플 때는 슬픈 대로 서로 도와주고, 기쁠 때는 서로 널리 알려 기쁨을 만끽하고 사는 후한 농촌 민심이다.

 어느덧 팥죽이 다 쑤어서져서 집집마다 팥죽 교환을 한다. 한 양푼씩 퍼 담아서 받침을 하고 이웃집마다 배달이 되어 진다. 가져간 집에서도 다시 자기 집 팥죽을 담아 준다. 팥죽 한 그릇 주고받고 희한한 풍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동안 만든 이, 일한 이들 수고하였다고 모두 한 그릇씩 팥죽을 먹는다. 이때 곁들여 나오는 것이 동치미국물과 백김치가 따라 나온다. 본래 팥죽을 먹으면 위산이 많이 나와서 생목이 생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백김치 무를 먹으면 위산을 방지한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음식궁합으로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다.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고 윗마을 갔다가 이경(二更)이 지나면 그동안 팥죽이 잘 식어 있다. 초저녁에 먹었던 팥죽은 다 어디 가고 금방 배가 고파 온다. 이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시 한 그릇씩 내 온다. 이렇게 금방 배가 고파 오다니 주는 팥죽이 식어서 빨리 먹으니 또한 별미로다. 팥죽 속에 흰 새알을 빼 먹는 것은 또 맛이 다르다. 그래서 너끈히 한 그릇씩을 모두 비운다.

 역시 동짓날에는 두 그릇씩 먹는 팥죽이 제일이다. 곁들인 백김치는 더욱 감칠맛 난다. 동지(冬至)에는 역시 팥죽 먹는 동지가 최고다. 󰃁

(푸른 숲/20100-20130319.)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