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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55)들밥

푸른 숲 제6수필집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많은 고향기억』

55. 들밥(野食)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시골 들판 가득히 농사일이 줄 서고 있는 농사철이다. 본래 농사철이면 부지깽이도 움직인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일손이 필요한 계절이 되고 있다. 집집마다 저마다 소 몰고 쟁기 챙기고 들판으로 나온다. 이른 아침부터 무논에 들어가기는 아직 발이 차다. 그래도 모내기철이라 빨리 논 갈아서 모내기를 하여야 수확을 기다린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바빠진다.

 들판에 고추잠자리들 작은 헬기처럼 날아다닌다. 하늘에 날렵하게 날던 제비도 먹이를 찾고서 쏜살같이 내리꽂히면서 먹이를 낚아챈다. 금년에도 우리 집 처마에 제비가 집지어서 벌써 새끼가 제법 컸다. 어미제비는 새끼를 먼 강남까지 데려 갈 의무로 비행연습을 시킨다.

 논둑에는 아버지 담뱃불 붙이려는 횃대에 흰 연기가 모락모락 나면서 불씨를 지킨다. 저만치 모판에서는 지게를 눕히고 모를 찐다. 나는 새하얀 다리를 걷어 올리고 모판의 모를 양손에 들어 논둑으로 옮긴다. 모두가 한 해의 농사를 잘 지어야 양식도 내고, 수곡도 하여야 살아 갈 수 있다.

 새참 나오면 줄줄이 논바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넓은 길가에 나앉아 칼국수를 소리 내며 먹는다.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되지만 사람들이 일하면 배가 빨리 고파지는 것이다. 새참이 잘 먹힌다.

 오늘 모내기 할 논은 이미 갈아 두었으므로 쓰레질만 하면 바로 모를 심을 수 있다. 1주일 전에 논둑은 새 흙을 퍼 올려 튼튼하게 만들어 두었다. 모내기가 끝나고 나면 논둑에 작대기 찍어 논두렁콩 심어야 한다.

 새참이 끝나자말자 바로 모내기가 시작된다. 아버지와 막내 형이 못줄을 대고 아버지 입에 호루라기 물고 계신다. 저마다 못줄 댄 곳부터 모를 심고 되돌아오는 안 줄에는 눈대중으로 모를 심는다. 두 줄 모가 다 심겨지면 아버지 호루라기 소리에 모두 허리를 편다. 이런 일들이 연속 동작으로 모내기를 한다. 모만 심으면 힘이 드니 어찌 한 곡조 모심기 노래가 없을 손가?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젖 좀 보소.

     많아야 보면 병이 난다./ 담배 씨 만큼만 보고 가소.

 하하하. 모내다가 심심하니 공연히 처자 젖은 와 보라 하겠노? 일하면서 노래하고 노래하면서 힘을 조절하고, 노랫말에 공연히 총각들 얼굴 달아오른다. 시골생활이 다 그러 하듯이 일하고 생산하여 명절 맞고 세경 받아 삶의 재미를 본다. 총각 처녀 결혼하고 새 가정을 이룬다. 대대로 그렇게 사람 사는 사회를 만들어 오고 살았다.

 오전 새참이 지나고 어느덧 배가 고파 오는 점심시간이 다가 온다. 길 가던 스님도 과객도 이때를 놓칠 수 있겠나?

“아, 농사일은 들밥 먹는 재미로 하는 거라던데.”

 지나던 길손이 남 가랑이 찢어지는 일에도 제법 밥맛을 느끼는 소리를 한다.

 어느덧 중식시간이 되면 어린 나를 포함하여 어머니, 형수, 누이 모두 들밥을 챙겨 나온다. 들밥 먹는다는 것은 들판으로 밥이랑 반찬이랑 이고 일하는 자리까지 와서 먼지 툭툭 털고 밥 먹는 시추에이션을 만드는 것이다.

 들밥도 갖출 것은 모두 갖춘 반찬이 나온다. 콩나물 무침, 여름김치, 야채겉절이, 된장찌개, 김치, 멸치 볶음, 감자 찌짐, 무를 깐 갈치, 파전, 무생채, 산나물 무침, 미역국, 고추 떡, 고추장, 참기름 등 나올 것은 다 나왔네. 그리고 숭늉은 덧 따라 나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밥 먹기 전에 부의주(浮蟻酒) 주전자 채 사발이 오면 돌려가며 일배주 쭉 마시고 그토록 힘든 일도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다. 들밥(野食) 먹는 우리들은 ‘여기 밥 있소, 잡숫고 가시오. 청국장도 있고, 들밥이라 참 맛있어요.’라며 지나는 이의 발길을 붙든다.

빈 논에 연둣빛 모들이 심겨져 가고 있는 모심기철에 들밥은 정말 농촌에서 후한 인심이 바로 나타난다.

 들밥이 끝나고 한마디씩 하고 길손들 떠난다.

“송계댁(松谿宅) 들밥은 먹어도, 먹어도 맛이 있어. 참 복 받겠소.”

 들밥이 집에서 먹는 것보다 나음은 신선한 공기, 바람 속에서 갖추 가져온 반찬과 밥에 신선함이 있어 더욱 맛나나 보다. 누구든 갑갑한 방안에서 밥 먹는 것보다야 들판에서 무한한 공기를 마시며, 놀이삼아 밥 먹는 것은 들밥 먹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기분을 느끼질 못할 것이다.

 들밥 한번 얻어먹으려면 송계댁 농사철에 자주 들러야겠다는 속내를 감출 수가 없다. 들밥이 우리네 농촌 사람들에게 주는 환상을 잊지 못하는 것이 저 하늘 높이 나는 제비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햇볕이 들밥에 한 번 더 쏘아 주고 지나간다. 󰃁

(푸른 숲/20100-20130321.)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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