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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46)싸리 씨

신작수필

46. 싸리 씨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사방공사는 이제 국가사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아마도 1962년부터라고 생각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이었다.

 5·16군사혁명 후에 국가사업으로 치산이 있다. 중국의 황제들이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하면 훌륭한 황제가 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근세조선 말부터 일제 침략기가 시작되고서 민둥산 천지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마치 해방이 아무것이나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해방인 줄 잘못 인식하고, 산의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 내고 마음대로 사용만 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정부가 수립이 되어도, 또 어찌하여 남·북(南北)으로 나뉘어 이념정쟁만 하였지 국민들 생각은 아랑곳없었기에 산에 나무는 마구잡이로 베어 넘어졌던 것이다, 자기가 베어 가면 자유인 줄 만 알았던 시대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무엇보다 제일 먼저 사방공사이었다. 사방 공사는 시기적으로 잔디 씨를 뿌렸다. 아울러 비가와도 사태가 나지 않도록 산골짜기마다 물막이 공사를 병행하였다. 싸리 씨를 심어도 사람들이 자꾸 나무를 몰래 베어 가기 때문에 드디어 아카시아를 대량으로 심었다. 삼림만 가꾸라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강요할 수 없으니 소득이 있어야 산을 가꾼다는 의미로 바로 유실수(有實樹)재배를 시작하였다. 지속적 사방사업을 완수하기위해서 이제 잔디 씨 말고 이차적으로 싸리 씨 채취이었다.

 싸리는 본래 우리 시골에서 많이 사용하던 나무이었다. 우선 싸리는 베어서 싸리 소쿠리로, 지게에 위에 얹는 바지게로, 싸리를 베어다가 개바자를 치고,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는 최고급 연료이었다. 싸리나무가 매우 큰 것은 유명한 절의 기둥도 하였다.

“내일 석굴암(石窟庵)으로 싸리 씨 채취하러 간다.”

담임선생님의 싸리 씨 공동채취를 발표하여 일단 오전수업을 마친 후 점심 먹고 나서 싸리가 많이 있는 석굴암으로 향했다. 우리학교에서 불국사를 거쳐 산골짝 길로 오동수를 지나 허위허위 토함산(吐含山) 8부 능선 오늘날 통일대불이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여 이제부터는 석굴암으로 내려가는 길을 간다. 10km를 거뜬히 오르고 내려간다. 모두가 책보자기 하나씩만 들었다.

 싸리나무는 줄기가 길게 자라고 잔가지가 많이 나면서 잎이 달리고 그 잔가지 끝부분에 적보라 꽃이 피어 있다. 꽃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군락을 이루면 그래도 제법 꽃의 자태를 갖추기도 한다. 꽃송이가 작아서 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미미하다.

이 보라색 꽃이 지면서 그 꼬투리에 씨가 맺힌다. 달린 씨가 여물 때 마침 우리 학교 학생들이 싸리 씨 채취에 동원된 것이다. 비탈진 길이지만 조심스럽게 싸리 씨 채취를 위해 내려간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가시에 긁히고 피가 나도 우리는 무엇을 먹기 위해 달려들듯이 그저 싸리 씨를 채취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한 사람도 아니고 우리 168명이 한꺼번에 싸리나무를 보고 누에가 뽕잎을 먹으려는 듯이 키 큰 싸리나무를 휘어잡아서 끄트머리의 씨앗을 훑는다. 마치 아프리카의 불개미가 정글을 지나듯이 우리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 모두가 책보자기를 양 가닥은 허리춤에 한번 묶고 앞으로 나온 두 가닥은 등 뒤로 묶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시골 학생들이라 스스로 자기 일을 할 줄 아는 것이었다. 마구 싸리나무 씨를 훑어서는 잎이 달린 채로 그저 묶인 책보자기 속으로 모으기 바쁘다. 이렇게 약 30분간을 훑으니 내 가슴에 한 아름의 싸리 씨가 모이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선생님의 호각 소리에 석굴암 요사 채 마당에 모였다.

 모두가 자기 몸에 묶어 둔 책보자기를 풀어 헤치고 싸리나무 잎이랑 줄기를 골라내고, 잎은 불어서 단지 싸리 씨앗만 모으게 되었다. 어떤 아이는 정말 많이도 채취하였다. 큰 책보자기에 가득 채취하였다. 마치 싸리 씨가 메밀 씨처럼 뭉툭 진 것이어서 붓기는 잘 붓는다.

 우리나라 사방공사를 위해서 잔디 씨앗에서 이제는 싸리나무 씨앗까지 채취를 하여야 했다. 그 때는 이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도 국가시책에 적극 협조 하였다.

 우리는 앞 세대에서 이렇게 치산을 위해 일하였노라고, 국가 시책에 적극협조 하였노라고 이글을 남길 뿐이다. 이제 비행기를 타고 국·내외를 가보더라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우리나가 금수강산(錦繡江山) 삼천리, 아니 대한민국 영토인 아름다운 산은, 치산으로 아주 잘 가꾸어져 있다. 󰃁

(푸른 숲/20100-20130312.)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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