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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43)초가 속의 보물

신작수필

43. 초가 속의 보물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우리 선대들은 시골에 살면서 욕심 없이 초가 속에서 생활을 즐겼다. 자손 대대로 이어가면서 조상을 섬기고 어른을 봉양하고, 효도하고 자식을 훈육하니 무슨 더 바람이 있었겠는가? 농사가 조금 잘 되면 곳간에 곡식이 조금 더 쌓이고, 또 식량하고 남는 것은 매매하여 논밭 사는 것이었다.

 이웃 간에 사랑하고 친척 간에 길흉사 꼭 찾아보고 슬픈 것, 기쁜 것 같이 나누어 화목하게 살았다. 작은 집안이 소 문중을 이루고, 마침내 대 문중을 꾸려 씨족이 되는 것이었다. 씨족은 자기 성(姓)과 본관(本貫)의 자랑이요, 조상을 위함이 남다르지 않았다. 큰 욕심 없이 가문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시골의 풍정(風情)*을 만들고 사는 것이었다.

 시골의 초가 방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남향집에 방문이 열리면 큰방에서 오른쪽 벽 위에 집안의 길사결과로 찍은 가족사진들이 큼지막한 액자에 꽉 들어찬 사진이 순서도, 수도 없이 들어가 있다. 사진들마다에는 사연이 꼬리를 문다. 큰아들 군에서 총 들고 근무하는 것, 돌하고 입학·졸업한 것, 봄 화전놀이에 활짝 핀 벚꽃 아래 양산을 받쳐 든 고부간의 사진, 시누·올케들의 김장하는 장면들까지 보인다. 또 아들·딸 결혼사진, 손자·녀, 외손자·녀 사진도 꼭 끼워져 있다. 어른들의 회갑잔치 상 받은 사진은 제일 위에 들어가 있다. 막내아들의 고시패스로 법관복 입고 찍은 사진도 보인다. 서편 벽에는 자식마다 공부 열심히 하여 받은 우등상장과 표창장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덤으로 외출복 먼지를 피하려고 ‘Sweet Home’이라고 수놓인 횃대보가 덮이어 벽을 커버하기도 하였다. 벽장 속에는 아주 귀중한 가문의 가보인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 남쪽 벽면 문 위에 화자(花字)로 된 “좌우명”이나 가로글씨로 “세대주 이름”을 쓴 것이 꼭 한 장씩 붙여져 있다. 집안의 안주인이 잊지 않은 것이 있다. 집안에 악귀나 잡신을 쫓아내려는 부적 하나쯤은 꼭 붙이고 산다.

 북쪽 면에는 이불이나 작은 농을 얹어 두는 시렁이 있다. 작은 농에는 제일 중요한 논밭의 등기문서가 들어 있다. 간혹 자식을 위한 보험쪼가리 한 장도 들어 있다. 옆으로는 이불이 가지런히 개이어 포개지고, 둘레에 아자무늬가 있고, 복복 자가 든 베개가 잠자는 사람 수만큼 쌓여 있다. 나는 이 시렁을 더욱 좋아한다. 시렁 위에는 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사를 모시고 난 후 메를 얹어 두었다가 파제 날 내려서 그 하얀 흰 쌀밥을 얻어먹게 되는 것이 좋았다. 이런 것들이 보물이다.

 방바닥에는 이글거리던 불을 재로 덮어 둔 화로하며, 부젓가락도 꽂혀있다. 연초통(煙草筒)이 화로 곁에 따라 다니고, 성냥 통도 함께 놓여있다. 동쪽 머리맡에 인두와 홍두깨도 걸리고, 다듬잇돌과 방망이까지 함께 위치하고 있어 다림질을 안 해도 이런 준비물이 상시로 놓여 있다.

 아침이면 밥상이 들여져 오고, 저녁이면 이불을 내려 베개를 놓는다. 아침엔 식당이요, 저녁엔 침실이다. 낮에는 모든 것을 치우고 생활도 하면서 거실로 손님도 맞이한다. 우리 시골의 조그만 방 하나로 용도가 정말 다양하다.

 집에서 담가 먹는 술독이 구들 목에 놓이고, 작은 이불을 덮으면 술 익는 마을이 된다. 밤이면 소피를 보러가기 귀찮아서 요강을 준비한다. 봄에 누에치면 잠실도 된다. 가을에 감을 따서 팔려고 단지를 들여다 감과 소금을 넣고 작은 이불을 덮어 삭여서 많은 돈을 마련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다 들어오시는 아버지 허리 지지려고 밥하는 외에 군불을 더 때서 온돌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는다. 아랫목 장판에 시뻘겋게 눋는다. 허리 펴고 누우면 피로가 사라진다. 요즘 황토찜질방이다. 초겨울에 감기기운이라도 있으면 흑설탕을 구해다가 뜨거운 물에 타서 한 그릇마시면 웬만한 감기도 도망가게 만든다. 무릎이 아프면 무를 즙내어 붙인다. 현대의 파스가 된다. 어찌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한꺼번에 발휘되는 초가 속의 생활이 아니던가?

 정녕 겉으로 보기와는 딴판으로 조그만 방 하나에 일곱 식구가 아침, 낮, 밤에도 활용도가 높은 초가다. 식사 때 식구 일곱 명이 둥근판을 하나 두고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리면 얼마든지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가 있다. 단지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것뿐이다. 밤이면 아버지가 대들보요, 자식은 연목처럼 이불 하나 덮고 따뜻하게 발을 걸치고 밤을 보낸다. 아버지는 심청전(沈淸傳)이나 옥단춘전(玉丹春傳) 창가를 하면, 어느 샌가 우리들은 깊이 잠을 이룬다.

 밤에는 듣기가 거북한 것이 있다. 남여가 한방을 사용하니 요강에 소피보는 소리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추운 겨울밤 자다가 바깥에 나가서 소피보고 오기가 귀찮으니 그럴 것이다. 시골 초가 속에는, 조그만 방 하나 속에서도 이렇게 여러 가지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막내딸이 대도시에 나가 공부 잘하여 취직되었다고 편지가 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아니하는 딸의 편지가 오면 아버지 까막눈이라 체부아저씨가 편지를 읽어 준다. 귀로 다 읽고 나면 대단한 자랑거리라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창호지를 ×자로 벽에 붙여 두어서 편지를 끼워둔다. 이렇게 또 중요한 서류보관처가 된다.

 이 모두가 우리 조상들의 초가 속에 살아오신 지혜로운 보물이 아니던가?

󰃁

(푸른 숲/20100-201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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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정(風情) : 풍치가 있는 정회(情懷)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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