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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35)벼 탈곡하기

신작수필

35. 벼 탈곡하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보리는 돌에다가 매치기 때문에 타작(打作)한다고 한다. 그러나 벼도 타작은 하지만, 곡식의 낟알을 이삭에서 기계를 이용하여 떨어내기에 탈곡(脫穀)한다고 한다.

 벼농사는 문전옥답도 있는가 하면 먼 곳에까지 가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모두 베어 집으로 가져와야한다. 사람이 지게로 이동하거나, 소에 길마를 걸치고 걸채를 얹어 싣고 온다. 정말 아날로그시대에 아날로그로 살았던 방법이다.

 벼를 짚 채로 모두 싣고 오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시대도 시대이고, 사고(思考)도 사고의 한계이었다. 왜 그렇게 무거운 것을 꼭 집으로 가져 와서 탈곡을 했는지 지금도 의문일 뿐이다.

우리 집에서 벼를 탈곡하려면 탈곡기를 빌려와야 했다. 물론 탈곡기를 빌려 사용하려면 사용한 세를 주어야 한다. 우리 동네에 탈곡기가 있는 집은 딱 한 집뿐이었다. 전날 탈곡기를 빌려두어야 탈곡을 하는 것이다. 빌려 온 탈곡기는 먼저 시운전하여 보아야 한다. 탈곡기 축에다가 기름을 부으면서 발판을 밟아 기름을 먹인다. 그때 소리가 “웨∼롱∼. 웨∼롱∼”하면서 부드러운 소리가 나야 한다.

 오늘은 탈곡하는 날이다.

 마당 양편에 쌓아 둔 볏단을 하나씩 들고 탈곡기에 갖다 대면 고부라져 달린 철사에 벼 알갱이가 부딪혀서 마구 떨어진다. 벼 알갱이 모두가 바로 돈이다. 벼는 탈곡 후 남아있는 벼 알갱이를 뱁댕이로 찾기에 정말 노력한다.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뒷집 기장댁 할머니도 오셔서 벼 알갱이를 따기에 분주하다.

 벼 탈곡은 할수록 재미가 난다. 마치 하얀 쌀밥을 생각하면서 일하듯 한다. 벼 알갱이가 마당에 쌓이면 갈퀴로 함께 떨어진 벼 잎들을 걷어내고, 고무래로 탈곡된 벼를 밀어 낸다. 이내 풍구에 돌려서 벼 알갱이만 모아 가마니에 담는다.

 바로 한 가마니, 두 가마니로 헤아려나간다. 벌써 오전만 해도 마흔 여 가마를 담아낸다. 아니 가마니 수만 헤아려도 그저 입에 쌀밥이 들어오는 것 같다.

새참을 먹는 동안에 힘없는 우리들은 탈곡기를 발로 밟아대며 장난친다. 중 머슴이 볏단을 갖다 댄다. 타∼타∼타∼ 벼 알갱이가 떨어져 마당에 쌓인다. 우리가 그 타∼타∼타∼ 소리에 재미가 나서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탈곡기를 자꾸 밟아댄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그렇게 발로 밟아대다가 힘이 그만 빠져 나가 떨어지고 만다.

 어른들은 새참을 먹고 곰방대에 담배 한 대 피우고서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매고 본격적으로 탈곡이 시작된다. 큰 머슴과 셋째 형님이 신나게 밟아대면 마당에는 금방 탈곡한 벼 알갱이가 가득가득 쌓인다. 모두가 땀 흘리면서 벼농사 탈곡을 한다. 우리는 자꾸 볏짚을 쌓아도 탈곡기 뒤로 빠져 나오는 짚단 치우기에 바쁘다. 탈곡한 뒤의 볏단을 차곡차곡 쌓는 것도 가술이다. 무너지거나 나중에 비가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볏짚은 나중에 짚공예 재료가 되고 소 먹이다 되기 때문이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탈곡하는 날 점심이 나온다. 모두가 땀을 훔치며, 밥상을 받아 허기진 배를 채운다. 타작하는 날 작은 동네에 점심시간이 되면 밥 얻어먹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에 모여 든 것이다.

 점심에 나온 밥상에는 은빛 나는 새하얀 갈치를 사다가 호박을 함께 넣고 찌진 것도 있다. 밥물 위에 밀가루와 고추를 섞어서 고추 떡을 만들어 둔 것도 있다. 들깨 햇잎을 따서 깨소금 간장에 절여 내어 놓은 깻잎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샛노란 콩잎도 있고, 토종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하며, 동해 감포(甘浦) 앞바다 멸치로 젓갈을 담가서 통 마리를 먹는 재미도 놓여있다. 물론 어르신들은 빠지면 안 되는 막걸리 사발도 오간다. 오늘 만큼은 새하얀 쌀밥을 마음껏 먹어 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점심을 챙겨 먹고 후식으로 나온 숭늉은 그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숭늉에 누룽지는 기본이고, 밥하기 위해 쌀 씻을 때 모아 둔 싸라기를 함께 넣고 끓인 숭늉은 타작하고 한 그릇 마시면 목구멍 까끄라기도 모두 넘어 가버리듯 그 맛이 구수하고 좋다. 마치 오늘날 식후 커피를 마시는 듯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벼 타작이 시작된다. 언제나 들어도 좋은 소리 “웨∼롱∼! 웨∼롱!”벼 타작하는 소리가 작은 동네 지축(地軸)을 흔든다. 이 지축 흔드는 소리가 많이 날수록 그 해의 벼농사가 잘 된 것이기에 그 소리 듣는 것이 나는 좋다. 물론 귀를 아프게 하는 높은 데시벨의 소리이지만 나는 그 소리가 정말 좋았다.

 또 금년 농사가 잘되어서 누님도 시집을 가겠지. 탈곡기 소리에 우리 집 식구들의 나이도 먹게 된다. 벼 타작하는 소리로 즐거운 시골의 생활이 이렇게 자꾸 연륜을 쌓아 간다. 금년에도 벌써 여러 번 벼 탈곡하는 날이 있어서 좋았다. 󰃁

(푸른 숲/20100-20130227.)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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