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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34)보리타작

신작수필

34. 보리타작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어렵고 힘든 보리밭을 매고 나면 기다려지는 것이 쌍갈래로 갈라지는 보리이삭이 처음에는 청맥(靑麥)으로 소담스러운 모습으로 있다가 어느 샌가 이것이 황맥(黃麥)으로 변한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보리들이 들판에 누었다가 일어섰다 한다. 다시 일어선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면 마치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누런 바다다.

 보리밭을 지나면서 쓸데없이 보릿대를 끊어서 알맹이 한 번 만져 보고 실한 열매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그만 보릿대로 피리를 만들어 분다. 보리피리다. 우리 동네에서는 “호대기”라고 했다. 보리피리가 아니고, 호대기다. 호대기를 만들어 불다가 집에까지 와서 불면 시끄러우니까, 집에서‘뱀 나온다.’고 못 불게 한다.

 시골에 보리가 익으면 아이들은 보리밭둑으로 잘 가려고 하지 않는다. 보리밭 속에서 문둥이가 지키고 있다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무서운 소리를 한다. 일종에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릿대를 짓밟아 놓으니까 못 들어가게 하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운 방지책의 말이 아닌가 싶다.

 온통 들판에 황금색 빛깔로 물들인다. 일찍 보리를 베기 시작한 집 밭에서는 벌써 보리밭이 그냥 쑥 사라지기도 하였다. 지난 해 농사지은 식량이 부족하기 시작하면 “보릿고개(麥嶺)”라는 것이 있다. 식구는 많고, 콩죽을 쑤다가, 나물죽을 쑤다가 그래도 보리쌀을 장만해서 보리죽을 쑤면 양껏 실컷 먹어 볼 수나 있는 것이다. 보리죽이 보릿고개를 넘는데 큰 몫을 한 것이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식구들 전체가 보리 베는 날이다. 논보리를 먼저 베어야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논보리 밭에 집중적으로 붙게 된다. 낫은 자주 숫돌에 간다. 보릿대 그루터기 두세 개를 한꺼번에 걸어 당기면 금방 날이 무뎌진다. 논바닥에 받쳐둔 숫돌에 낫을 갈아 쓴다. 낫의 날은 안으로 굽어진 면과 버드러진 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숫돌에 낫을 갈 때는 주의하여야 한다. 어느 한 쪽만 많이 갈면 날이 넘어서 못쓰게 된다. 그래서 낫은 양날에 고루 갈아 준다.

 낫은 어떻게 보면 흉기다. 항상 보리 베기를 할 때는 조심하여야 한다. 당시 자동화된 기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낫으로만 벌판의 보리를 모두 베어 내어야 한다. 한줌 모아 베어 놓고 일어서서 허리 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보리를 베는 그 심정은 누가 알아 줄 것인가?

이런 일을 하지 않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오로지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여야 한다. 모두가 농촌에 태어난 죄밖에 없다. 농부의 아들이다. 그것도 형님 넷, 누나 다섯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죄 뿐이다. 남아로 태어남이 축복이어야 하는데 한이 쌓인다. 당시 어린 나에게도 머슴들과 똑같이 일을 하여야 했다. 새참, 들밥(野食)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행동을 하여야만 했다.

 그 많던 들판의 보리를 모두 베어 넘어뜨려 두었다. 며칠간 말려서 보릿단 묶기에 또 동원되어 진다. 보릿단을 군데군데 모아서 소에 길마를 얹고 걸채를 설치하여 보릿단을 집까지 날라야 한다. 겨우 여덟 살 되는 나도 소를 두 마리나 몰고 보리를 싣고 집으로 이동 시키는 일을 한다. 물론 논, 밭에서 보리를 실어 주면 나는 두 마리의 소고삐를 잡고 길을 가야 한다. 어려서 양편의 소 짐에 묻혀 아이는 사라지고 소 두 마리만 걸어가게 된다. 모두 집에 가져 와서 타작을 하여야 한다. 너른 마당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높이 쌓여서 보리타작을 기다린다.

 보리타작하는 날이다. 시골에서 타작을 하는 도구는 마당 한 가운데 덩그렇게 놓인 바윗돌 덩어리 한 개 뿐이다. 곁에 둔 보릿단을 짧은 새끼줄로 아랫부분을 감아쥐고는 냅다 들고 내리치는 것이 보리타작이었다. 문제는 보리타작에서 돌에 두드려서 알맹이를 떠는 것 외에 보릿단 짧은 부분에 들어 있는 보리 톨을 따기 위해서 연세 드신 분들은 뱁댕이를 사용한다. 대나무 두 가닥을 가지고 가운데에 가로질러 묶어서 남아있는 보리 톨을 마저 따 내는 것이다. 또 대나무 칼을 만들어서 보리 톨을 따 내기도 한다.

 타작한 보릿단을 가장자리로 던지면 어린 우리들은 보릿단을 차곡차곡 쌓는 일을 한다. 나중에 땔감으로 하기 위해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둔다. 보릿단 쌓는 우리들은 이때나마 보릿짚 더미 위에서 장난도 치면서 즐거워한다.

 타작이 되어 쌓인 보리 알맹이는 바께스에 퍼 담아 풍구로 돌려서 이물질을 골라낸다. 가마니마다 보리 알곡이 차곡차곡 담기어 그 해의 보리농사 생산량을 헤아린다. 100가마니 200가마니를 곳간에 쌓아 두는 쏠쏠한 재미 다. 맑은 날 보리를 창고에서 끄집어내어 말린다. 한 해의 양식이 결정된다. 금년에 보리쌀이라도 풍족해야 보릿고개 때에 배를 채울 수 있다.

 보리타작이 끝나고 나면 당일 저녁에 먼저 보릿짚을 불태우고 남자들은 팬티만 입고 거슬려서 보리 까끄라기를 태우고, 그대로 중보(仲湺)머리로 달려가서 낮에 흘린 땀을 말끔히 씻어 내면 보리타작이 끝났음이다. 󰃁

(푸른 숲/20100-20130226.)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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