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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 뒷동산에는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32)논매기

신작수필

32. 논매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시골 모내기를 한 논에서는 벌써 착근하여 땅기운을 받아서 그런지 모 잎들이 짙푸른 색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모내기를 한 들판을 바라다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저절로 불러 온다.

 그 넓은 경주분지의 가장자리 들판이지만 이 지역 곡창(穀倉)에서 나는 쌀로 모두 밥을 먹고 산다. 경지정리(耕地整理)가 되지 않은 논바닥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작은 천으로 만든 조각보처럼 저마다 논둑의 모양새가 천 가지, 만 가지다. 한 마디로 들판의 자연모양새가 너무나도 알록달록 아름답다.

 겨우 모내기를 끝내고 돌아 서면 초벌 논매기가 시작된다. 초벌 논매기는 아버지와 막내 형이 논바닥을 샅샅이 문대가면서 매 둔다. 그러면서 비뚤어진 모도 바로 세우고, 웃자란 논 풀들을 뽑아서 논바닥 흙 속으로 파고 묻어버린다. 아직 어려서 나는 초벌 논매기를 못한다. 논을 방금매고 나간 자리에는 작은 동그라미 모양의 잎 새가 있는 무논의 마름 풀들이 방긋 웃어 준다.

 두벌 논매기부터는 나이 어린 나에게도 일할 기회가 돌아온다. 바로 논매는 기계가 있다. 마치 물레방아 쐐기 모양으로 생긴 작은 톱니바퀴들로 1단에서 3단이 달려 있고, 서서 밀수 있도록 자루가 달린 논매는 기계이다. 이제 제법 모도 자라 올라 모가 앙증맞은 내 작은 무릎까지 자라 오른다.

 이즈음 먼저 아버지께서 나에게 기계로 논매는 방법을 설명하신다. 항상 논매는 기계가 무논에 들어갈 때는 심어 놓은 벼를 다치지 않게 똑 바로 들고 넣어서 골마다 똑바로 밀어 주어야 한다고 누누이 설명하신다. 기계로 밀 때는 힘을 주어 앞으로 밀고, 다시 뒤로 당겨서 잡초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려면 논매는 기계로 이보 전진, 일보 후퇴 하는 것으로 연속적으로 앞으로 골마다 나아가면서 두벌 논매기를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겨우 서당이라는 것을 다니면서 논매는 것을 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아침을 먹고 서당에 30분 내로 다녀와서 묘답 다섯 마지기 에 논매는 기계를 들고 왔다. 바짓가랑이를 살짝 걷어 올리고 양팔에 팔찌를 끼고, 보릿짚 모자를 눌러쓰면서 목에다 햇빛 가리려고 수건을 둘렀다. 어찌 천상에 어린농부의 모습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기계를 논바닥 골에 집어넣었다.

“쏴르르∼쏵! 쓰억∼, 쏴르르∼쏵! 쓰억∼!”

 세 바퀴의 구르는 동작에 논바닥의 흙이 파 뒤집어지면서 으깨어지니까 논바닥의 잡초는 괴멸(壞滅)되는 것이다. 마치 전차가 풀숲으로 지나면서 바닥 청소를 해 버리는 원리다. 논바닥 굳은 흙덩이를 파고, 뒤집고, 으깨어 버리는 원리로 논을 매는 것이다. 모의 뿌리를 훨씬 위로 적셔져 있는 높이의 무논에 들어가서 논매는 기계로 이 동작을 하루 종일하여야 한다.

고랑의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밀고, 또 밀고 계속 밀어대야 한다. 그러다가 힘이 들면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을 바라다보면서 타고 내리는 관광객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난다.

‘나는 어이하여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겨우 초교를 졸업하고, 마을 서당에 15분이면 다 배우는 한문(漢文)을 배우러 다녀야 하나? 어제 배운 것 문장 암송(暗誦)하고 그 뜻을 풀이해 올린 후에 오늘 배울 곳에 낱글자를 읽고, 문장 읽고, 해석하면 그렇게 막힘이 없이 하면 잘 했다고 훈장님의 칭찬 한 번 듣고, 이제는 붓 들고 먹 갈아 오늘 배운 문장을 쓴다. 한문도 문장을 많이 써는 것은 아예 창호지 양면으로 사이에 칸 그은 것을 넣고 잔글씨를 쓰기도 한다. 이런 공부를 하여야 하며, 논매기를 언제까지 하여야 하나?’

무논에 두벌 논매기 하면서 내 인생(人生)을 둘러 본 것이다.

다시 고랑에다가 기계를 집어넣는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땀이 젖는다.

“쏴르르∼쏵! 쓰억∼, 쏴르르∼쏵! 쓰억∼!”

 논매는 기계소리가 나의 귓전에는 자장가로 들릴 뿐이다. 나의 초교 동기들은 내가 무논에서 기계로 밀고 있는 동안에 교실에서 영어, 수학, 국어를 배우고 있겠지. 나는 논매고 서당에 꿇어앉아서 공자 왈 맹자 왈 읽고 있을 뿐이다. 한 골을 밀고 나오면서 오늘 배운 한문책을 펴 두고, 외어도 보고 다시 한 고랑 밀고 와서 책을 확인하다. 주경주독(晝耕晝讀)이다.

 두벌매기 논을 맨다. 하루 종일 논을 기계로 맨다. 허리가 휘도록 민다. 그 사이에 혹시나 싶어 아버지께서 점검을 나오신다. 짝 가래를 어깨에 겯고 오시는 그 짝 가래 끝에 고추잠자리가 앉아 호시를 탄다. 나는 새참도 없다. 아이는 서럽다. 일을 해도 새참도 없다. 그래도 나는 무논을 매고 있을 뿐이다. 󰃁

(푸른 숲/20100-20130224.)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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