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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53)원효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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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53. 원효대사(元曉大師)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성은 설(薛)씨요, 이름은 아명이 서당(誓幢)이었다.

 조부(祖父)는 잉피공(仍皮公)이고, 부친(父親)은 담날내말(談捺乃末)인데, 모친은 무식하나마 천성이 온순하고 총명하여 아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하루는 그 모친의 꿈에 별이 품 안에 들어옴을 꿈꾸고 곧 태기가 있었는데 달이 차면서 밤을 따러 산에 올라갔다가 돌연 산기(産氣)가 나 밤나무 밑에서 해산을 하는데 오색(五色) 구름이 천지를 물들였다. 그 부친은 산에서 생남(生男)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창황히 달려가 자기의 옷을 벗어 밤나무에 걸쳐 그 안에서 산모를 눕히게 하였다.

 그 때는 신라(新羅) 제26대 진평왕(眞平王) 9년이었다. 뒤에 이곳을 “율곡(栗谷)”이라 하고, 그 나무를 “사라수(紗羅樹)”라 하였는데, 밤〔栗〕이 다른 밤과 다르므로 “사라율(紗羅栗)”이라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에서 딴 밤을 주지(住持)가 절에서 일하는 종에게 날품으로 밤 두 개씩 주었더니 그 종들이 관가에 송사(訟事)를 하였으므로 관리(官吏)가 이상히 여겨 밤을 가져 오라 하였더니 밤 한 개가 한 바릿대(한 사발)에 가득한지라. 이를 본 관리가 다음부터는 한 개씩만 주는 것으로 판결(判決)을 내렸다고 한다.

 원효는 자라면서 더욱 재주가 있어서 글 읽기를 좋아하고 스승이 없어도 능히 불서(佛書)를 해득하였다.

 성년이 되어 불법(佛法)을 연구할 때 남이 하나를 알면, 원효는 열을 알고 남이 열을 깨달으면 원효는 백을 깨달았고, 특히 웅변에 능하여 설법(說法)을 잘 하였으며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대성(大成)하였다. 당시에는 불교가 들어 온 당(唐)나라에 유학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길 뿐더러 마땅히 있어야 될 줄로 알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의상(義湘)과 육로(陸路)로 걸어서 당나라에 가기로 되었다. 날이 저물어 숙소(宿所)를 찾았으나 무인(無人)지경이라 방황 끝에 우연히 길가에 빈집이 보이므로 다행히 두 사람은 그곳에 들어 가 머무르게 되었다. 원효는 한밤중에 갈증이 나서 먹을 물을 찾다가 마치 사발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으므로 한숨에 들이마시고 누워 잤다. 그 이튿날 날이 밝아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어제 밤에 물 먹은 그릇은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이었고, 빈집인줄 알았던 집은 낡은 무덤이었다.

 원효는 비위가 뒤집혀 그만 어제 밤 마신 물을 토해 버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오직 마음에 달렸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의상(義湘)에게 당나라로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말하였더니 의상(義湘)이 그 이유를 물으매,

“내가 냉수인 줄 알고 물을 마실 적에는 심신이 상쾌(爽快)하더니,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인 줄 알고는 마음이 심히 불쾌(不快)하여 도로 토(吐)하고 말았으니, 세상 모든 일이 모두 마음에 달렸고, 만 가지 법도 마음속에 있는 줄 깨달았으니 고국에 돌아가 우선 마음을 수련하고자 한다.”

 이렇게 대답을 하고 원효는 신라 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귀국한 원효(元曉)는 더욱 진심으로 공부하여 천 수십 권이나 되는 저서(著書)를 하였고, 그 뿐만 아니라 빈한(貧寒)과 병(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고, 설법(說法)하여 이름이 천하에 떨치었다.

 그리고, 또 향전(鄕傳)에 적혀 있는 괴이한 사실을 들으면 어느 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미친 사람같이 한길을 거닐며 큰 소리로,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면,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무열왕(武烈王)은 이 말을 들으시고,

“이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귀부인(貴婦人)을 얻어 나라에 이바지할 현인(賢人)을 낳고자 함이다.”

라 하고 궁인(宮人)을 보내어 원효대사(元曉大師)를 찾을 때 대사는 미리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남산으로부터 남천(南川)을 건너 성(城)안으로 오다가 일부러 유교(楡橋)에서 떨어져 의복(衣服)을 죄다 적시고 말았다.

 궁인이 대사를 이끌어 과부(寡婦)로 있는 요석궁(搖石宮) 공주(公主)댁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말리게 하였다. 그 후 공주는 임신하여 드디어 유명한 신라 십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설총(薛聰)은 한자(漢字)로 우리말을 표시하는 이두(吏讀)를 정리하고 경서(經書)에 토(吐)를 달아 읽는 법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문화사상(文化史上) 큰 공적을 남겼으며, 사후(死後)에 공자묘(孔子廟)에 모시어 추앙을 받는 분이 되셨다.

 원효대사는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복(俗服)하고 호(號)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여 광대가 가지는 큰 표주박을 얻어 그 속에 행구(行具)를 넣고 다녔다 하며, 또한 “무애(無㝵)”라고 호(號)하였음은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글에 인함이라 한다.

 불가(佛歌)를 지어서 널리 세상에 퍼뜨리고 방방곡곡(坊坊曲曲)으로 돌아다니면서 홍도(弘道)에 여생을 바치었다.

 대사는 분황사(芬皇寺)에서 『삼매경(三昧經)』,『화엄경(華嚴經)』 등의 불서(佛書)를 엮을 적에 언제나 붓과 벼루는 소〔牛〕 두 뿔에다 걸어 두었으므로 호를 “각승(角乘)”이라고도 불렀다.

 대사가 분황사(芬皇寺)에서 죽은 뒤 아들 설 총(薛聰)이 유해를 부수어 대사의 인형(人形)을 만들어 분황사(芬皇寺)에 안치(安置)하고 예배(禮拜)를 할 때 홀연 인형상(人形像)이 절하는 설총(薛聰)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그 고개는 고려(高麗) 때까지 돌린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대사의 출생지를 “불지(佛地)”라 하고 처음 이룩한 절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하며, 사라수(紗羅樹) 부근에 “사라사(紗羅寺)”를 세웠다.

 

참고 자료

○ 원효(元曉) : 신라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고 전하며, 또 밤[栗]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 밤[裟羅栗]”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가계(家系) : 성은 설씨(薛氏), 아명은 설서당(薛誓幢) 또는 설신당(薛新幢)이다. 원효는 법명(法名)이다.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설 담날(薛談捺)의 아들이다.

○ 활동사항 : 원효는 경상북도 압량(押梁, 현 경산시) 출신으로 15세경에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였는데, 기록에는 원효가 고구려로부터 망명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와 있던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慈藏)으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원효는 울산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인 낭지(朗智)를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였다. 원효는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義湘)과 함께 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가,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실계(失戒)한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다. 광대 복장으로 지내며 『화엄경(華嚴經)』의 이치를 쉬운 내용으로 담은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퍼뜨렸다.원효는 많은 글을 저술하였으나, 문자나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원효는 인간이 값어치 있기 위해서는 본연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위풍당당한 법사(法師)였지만 어떤 때는 소박하고 겸허한 서민이기도 하였는데, 법복을 입었다 하여 깨쳤다고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구제받을 수 없는 진짜 천민이라고 갈파했다. 원효『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였는데,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금강삼매경』의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원효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한다.양산 지역에서 원효대사의 활동 및 이야기는 다양한 문헌 설화와 이 지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구비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양산 지역 원효 설화로는 천성산 내지 원효봉 설화가 유명하다. 이들 설화는 공통적으로 원효천성산에서 득도하기까지 수련한 과정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원효천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양산 지역의 불교는 활황의 시대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 학문과 사상 : 원효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일심사상(一心思想)이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저서인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원효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둘째,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원효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원효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원효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원효의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셋째, 무애사상(無碍思想)이다. 원효의 무애사상은 자신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원효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원효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원효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그러므로 원효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원효의 사상, 특히 화엄사상은 양산 지역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원효 설화에서 잘 나타나 있다.

○ 저술 및 작품 : 원효는 일생 동안 86부 180여 권의 저서(혹은 100여 부 240권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를 남겼다. 신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질(質)에서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당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현존하는 원효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대승기신론소』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인도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은 저작으로서 원효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 저술이다.

○ 원효대사(元曉大師) 연보(年譜)

-617년 경상북도 경산 지방에서 설날담(薛捺談)의 아들로 출생

-647년 출가(出家)하여 황룡사(皇龍寺)에 들어 감

-650년 의상(義湘)과 함께 입당(入唐)할 뜻을 세웠으나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南陽) 근처〕에서 득도(得道)하고 돌아 와 분황사(芬皇寺)에 들어 감.

-686년 혈사(穴寺)에서 열반(涅槃)

●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저서(著書)

-대자도경종요(大慈度經宗要)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범강경보살계본사기(梵綱經菩薩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판비양론(判比量論)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푸른 숲. 2013.01.11.)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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