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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50)포석정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50. 포석정(鮑石亭)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시대에 서울을 비롯하여 나라는 가장 부귀하여 고루거각(高樓巨閣) 높고 좋은 집이 연장하고 초가집이 하나도 없으며, 피리와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시절까지도 순조로 왔다.

 그 때 어느 날 왕은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 놀이를 베풀었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바닷가에 잠시 쉬고 있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일고 천지가 캄캄하며 앞길조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괴이하여 점(占)을 쳐서 물어 보니 일관(日官)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우선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합니다.”

고 하였다.

 그래서 유사(有司)에게 명(命)하여 용을 위하여 그 근처에 한 절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더니 구름과 안개가 다 개었다. 그래서 이곳을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이끌고 어전(御前)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송하여 노래하고 음악을 울리며 춤을 추고 그 한 아들을 왕께 바쳐 함께 서울로 가서 정치(政治)를 보좌(補佐)하게 하였다. 이 용의 아들이 “처용(處容)”이라 왕은 처용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하여 아리따운 아내를 주고 벼슬도 주었다. 처용(處容)의 아내도 절세미인(絶世美人)인데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변신(變身)을 하고 어떤 날 밤 그의 집에 이르러서 몰래 함께 잤다.

 그 때에 처용은 어디 갔다가 집으로 돌아 와 보니까 부인(夫人)이 딴 남자와 함께 자고 있는지라 자기는 노래 부르며 춤추고 그곳을 피해 주었다.

 

처용가(處容歌)

 긔 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 자보곤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 내해다마

아 엇디릿고.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 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이와 같은 큰 도량에 역신은 놀라며 모양을 나타내고 처용(處容)의 앞에 꿇어 말하되,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犯)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하지 않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公)의 화상(畵像)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風俗)에 처용(處容)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역신의 해를 피한다고 하는 풍습(風習)이 되었다.

 왕은 그 후 포석정(鮑石亭)에 행행(行幸)하였는데 남산신(南山神)이 어전(御前)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王)에게만 보였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왕은 이 춤을 본 따서 몸소 추어 보여서 그 본을 남겼는데 산신(山神)의 이름이 “상심(詳審)”이므로  그 춤을 “어무상심(御舞詳審)”이라 하였다.

 이 포석정은 봄, 가을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산곡(山谷)에서 맑은 물이 사시(四時)로 흘러 우거진 고목나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참고 자료

○ 포석정(鮑石亭) : 통일신라시대에 역대 왕들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이 이곳에서 대신들과 연회를 벌이다가 기습해온 백제의 견훤(甄萱)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돌로 된 수로(水路)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원래는 남산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돌 거북이 있었고, 그 입으로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인공의 기술이 조화롭게 합쳐진 곳으로, 신라의 궁원기술과 당시 사람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포석정에서 어무상심무(御舞詳審舞)를 춘 헌강왕(憲康王)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처용랑(處容郞) 망해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해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기 때문에, 왕은 그 모습을 따라 춤을 추어 보였다. 왕이 산신을 따라 춤을 추었다고 하여 ‘어무산신(御舞山神)’또는‘어무상심(御舞祥審)’, ‘상심무(祥審舞)’라 불렀으며, 이후 신라의 춤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王羲之)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鮑石亭)은 이를 본 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鮑石亭)뿐으로, 당시 신라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

(푸른 숲. 2013.01.08.)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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