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42)화주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42. 화주(火珠)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동경잡기(東京雜記)에 화주(火珠)는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라고 하였는데, 햇볕에 쬐면 불이 일어나고, 솜을 갖다 대면 곧 타고, 밤에는 낮과 같이 밝아지며, 멀리 비치고 자동차 불 모양으로 멀리까지 밝아졌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는 성냥과 전기(電氣)같은 것이 없던 때라 오늘날 화경(火鏡)과 같은 것이 아닌 가 추측(推測)된다.

 그러나 책에도 삼보의 하나로 기재 되어 있고, 민간에서도 신종(神鐘)을 빼고 금척(金尺), 옥적(玉笛), 화주(火珠)가 삼보 또는 삼기라 하니 귀중한 것이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겠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유리컵들은 1915년 분황사(芬皇寺) 탑을 수리할 즈음에 돌 궤에서 발견(發見)된 것이다.

 이 화주(火珠)에 대해서는 전설이 구구하나 확실하지 못하다.

 

참고 자료

○ 신라 삼기(新羅三奇)

 오늘날까지 경주지방 일대에 구전되어 오고 있는 것으로 현대과학으로서는 풀기 어려운 세 가지 기이(奇異)한 것이 있다.

이것을 신라 삼기라(新羅三奇) 한다. 즉 삼기(三奇)란 옥적(玉笛), 신종(神鐘), 금척(金尺)을 말하는데,

 첫째, 옥적(玉笛, 옥피리=萬波息笛)

 이 옥피리를 불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적병(敵兵)이 쳐 들어올 때에 불면 비가 오고, 장마 때 불면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할 때에 불면 평온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옥피리는 신라 땅 이외의 곳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 옥피리는 반드시 한 사람만이 불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 옥적(玉笛, 萬波息笛說話)/ 브리태니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졌다는 신기한 피리 설화.

 신라(新羅)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山)과 용(龍)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國寶)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다.

 이 설화는 신문왕(神文王)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게 되는 신비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만파식적은 환웅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은 성격의 신성징표이다.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립하고, 지배계층의 동질성을 재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文武王)과 김 유신(金庾信)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神物)설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栢栗寺條),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동사강목(東史綱目)』등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둘째, 신종(神鐘, 에밀레종=奉德寺鐘)

 여아(女兒)의 희생으로 이 종이 만들어졌고, 황동(黃銅) 십이만 근(十 二 萬斤)이나 들었으며, 사람의 새끼손가락〔小指〕으로 쳐도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셋째. 금척(金尺, 금자)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이 자〔尺〕로서 재기만 하면 다시 살아난다는 금자이다. 이 금자는 지금 경주시 서면 금척리(西面金尺里) 금척고분(金尺古墳) 속에 있다 하나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왜인(倭人)이 금척(金尺)을 발굴하려다가 죽고 말았다는 구전(口傳)이 돌고 있다.

금척 설화에 얽힌 유래 1

 옛날 신라에 금자〔金尺〕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 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 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당나라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 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土墳)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참고자료 : 답사여행의 길잡이)

○ 금척설화에 얽힌 유래 2

 건천읍과 맞붙어 있는 고도 경주시에 가면 숱한 고분과 봉황대(鳳凰臺)가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신라 서울 경주는 지리적으로 새 봉황(鳳凰)의 형국이라고 하였다. 이 새가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면 장안의 여기저기에 봉황 알을 만들어 놓아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어 떠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봉황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가 망하자 경주는 봉황의 형국이 아니라 배의 형국인데 이 무거운 산더미 같은 짐을 배에 가득 실었으니 배가 물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가 망했다고 한다.

 금척리(金尺里)는 경주에서 국도를 따라 광명과 모량(毛良)을 지나 건천읍을 향하는 10Km지점에 있다. 도로변 양편에 작은 산 같은 고분이 40여 개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까운 건천읍에서는 반대로 내려오는 오리 길 지점에 마을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금척리이다. 금척(金尺)이란 글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尺)”라고 하는 뜻이다. 그 옛날 신라 진평왕이 정사(政事)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다. 눈앞에 일곱 무지개가 곱게 나타나더니 금으로 된 황금 자 하나를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졸음에서 번뜩 깨어났다. 그런데 그때 꿈속에서 신선으로 부터 받은 그 황금 자가 거짓말처럼 바로 눈앞에 놓여 져 있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그 자로 재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런 자였다. 나라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그 자를 가진 사람에게만 한한다고 하는 보물이다. 그 덕택인지 신라는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진평왕 대에 이르러 신라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황금의 자가 있어서 날로 국력이 부강해진다고 하는 소문이 당나라 황제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 황제는 이것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이 거절을 하고, 갖다 바치지 아니하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처부수고 말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백성들을 충동하여 여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 왕릉과 같은 고분을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금 자가 묻혀있는 금척(金尺)이다.

왕릉 같기도 하고 봉황대 같기도 한 큰 무덤이다. 왕은 이 어느 고분 속에 자신만 알고, 혼자 이 금자를 묻어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당나라 신하들과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평왕은 급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의 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밖에 모르는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때의 이야기다. 고증(考證)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황금 자가 탐이 나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1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대홍수(大洪水)가 났다. 일본인 발굴단은 부득이 철수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 고분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解放)과 6.25사변을 거쳐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 금척리 고분은 말없이 그대로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래서 이 근방의 동네 이름을 금척(金尺)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의 기차선로를 중간에 두고 서쪽 단석산편은 곡산 한씨(韓氏)네가 많이 살고, 동쪽 편은 영천 이씨(永川李氏)와 순홍 안씨(順興安氏)가 산다. 그래서 그런지 한씨와 이씨 사이는 연비연사간이 많다고 한다. 참고문헌 : 건천읍지, 검 토 : 향토사학자 김 태중

○ 금척 찾아가는 길

 건천읍 금척리에 있다. 경주에서 두대리 입구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건천 쪽으로 5.5km 가면 길 양쪽으로 고분군이 있다. 길 한쪽에 잠시 주차하여야 한다. 버스를 타고 갈 경우 경주시내에서 건천행(乾川行)을 탄 후 “모량(牟梁)”에서 내리면 된다. 󰃁

(푸른 숲. 2012.12.31.)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