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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41)진평왕과 옥대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41. 진평왕(眞平王)과 옥대(玉帶)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삼국유사(三國遺事)』1권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신라 삼보(新羅三寶)의 하나로서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원년 8월에 즉위 한 후, 어느 날 홀연히 천사(天使)가 뜰에 내려와 왕(王)을 불러 이르기를,

“상황(上皇)께옵서 나더러 이 옥대(玉帶)를 왕께 전하라 하시기에 가져왔노라!”

왕(王)은 황공하여 무한히 사례한 후 옥대를 받았다. 그 후부터는 나라의 길흉 예식(吉凶禮式)에는 반드시 이 옥대를 매었다. 얼마 지난 뒤 고구려(高句麗) 왕(王)이 신라(新羅)를 치려고 하였으나 신라에는 국가를 수호(守護)하는 삼보(三寶), 즉 장륙존상(丈六尊像), 목탑 구층탑(木塔 九層塔), 천사옥대(天賜玉帶)가 있음을 알고 침략의 의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옥대는 그 뒤 오랜 세월을 지나매 사용도 하지 않고 따라서 존재도 모르게 되었다. 그런지 오래 된 어느 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신라(新羅)의 김 률(金律)을 보고 묻되,

“그 대의 나라에는 삼보가 있다는데 그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아는가?”

김 률은 확실한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렸다.

 귀국하여 경순왕(敬順王)께 아뢰었더니 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 놓고 물어 보았으나 모두 알지를 못하였다.

 뒤에 황룡사(皇龍寺)에 있는 90된 중이 남고(南庫)에 두었다 함을 말하매 문을 열었더니 낮인데도 불구하고 캄캄해지며 번개와 우뢰가 치면서 폭풍우가 쏟아지는지라 다시 문을 닫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제사를 올리고 꺼내어 본즉 옥대는 10위 62과(十圍 六十二骻)의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띤 체격의 진평왕(眞平王)의 키는 3m 30cm나 되는 큰 사람이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 신라의 삼보(三寶)

 제26대 진평대왕(眞平大王)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요,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3m 30cm)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이상은 잘 알려진 신라삼보 중 하나인 “진평왕의 천사옥대”에 대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옥대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옥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신라3보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은 신라의 3보를 슬슬 탐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신라 3보 중 “이동(移動)”이 가능한 천사옥대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경명왕 5년 조에, 5년(921) 봄 정월에 김 률이 (경명)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五年 春正月 金律告王曰“臣往年奉使高麗 麗王問臣曰‘聞新羅有三寶 所謂丈六尊像·九層塔幷聖帶也 像塔猶存 不知聖帶今猶在耶’臣不能答”王聞之 問羣臣曰“聖帶是何寶物耶”無能知者 時有皇龍寺僧 年過九十者曰 “予嘗聞之 寶帶是眞平大王所服也 歷代傳之 藏在南庫” 王遂令開庫 不能得見 乃以別日齋祭 然後見之 其帶粧以金玉甚長 非常人所可束也.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南庫)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사옥대의 존재에 대해 신라 왕실에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옥대는 오랜만에 “발견”되었고, 이것의 존재여부를 신라 왕실은 이제 알게 되었다.

왕건이 신라3보의 가치를 중시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야사에서도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新羅)를 치려고 꾀하다가 말하기를 신라(新羅)에 세 보배가 있으니 범(犯)하여서는 안 된다. 무엇이냐 하면 황룡사(皇龍寺)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이 첫째요, 그 절의 구층탑(九層塔)이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셋째이다. 하고 이에 그 계책(計策)을 그치었다.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정말로 왕 건(王建)이 신라 공격을 꾀하다가 고작 3보 때문에 그치지는 않았겠지만, 민간에서는 저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3보는 국가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 건(王建)은 신라 병합시에 신라의 정통성을 삼보의 인수인계를 통해 넘겨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는 왕 건(王建)에게 항복하던 무렵,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왕 건(王建)에게 바치게 된다. 영토를 넘김으로써 땅에 붙어있는 부동산이나 다름없는 2개 보물에다, 동산인 천사옥대(天賜玉帶)까지 바침으로써 신라(新羅)의 정통성을 넘긴다는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삼국유사 기이편>

○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천사옥대〔天賜玉帶 :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 937년 5월에 정승(正承) 김 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骻)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1권 경상도 경주부.

천사옥대(天賜玉帶) : 진평왕(眞平王) 원년에 신인(神人)이 궁전 뜰에 내려와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나에게 옥띠[玉帶]를 전하라고 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꿇어앉아 받아서 교제(郊祭)와 묘제(廟祭) 등 큰 제사에 모두 착용하였다. 그때 사람이 찬미하기를, “구름 밖에서 하늘이 옥띠를 하사하니, 임금의 곤룡포와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 지금부터 몸 더욱 무거우시니, 내일 아침에는 쇠로 섬돌을 만드리라.”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에 고려 태조에게 바치니, 바로 금을 새기고 옥을 박아 모나게 만든 허리띠로, 길이가 10위(圍)이고, 띠쇠가 62개였다. 물장고(物藏庫)에 간직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 사자 김 률(金律)이 고려에 왔을 때에, 태조가 묻기를, “들으니,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장륙금상(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제대(聖帝帶)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가?” 하였다. 김 률이 대답하기를, “성제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높은 신하인데, 어찌 모르는가?” 하니, 김 률이 부끄럽게 여겼다. 돌아와 경순왕에게 보고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나이가 90세가 넘은 황룡사 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착용하던 것으로, 역대의 임금들이 보배로 전해 와서 남고(南庫)에 간직해 두었다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창고를 열고 찾으려 하니,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대낮이 캄캄하게 되었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재계하고 제사한 뒤에야 찾아내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기 때문에 성제대라 일컫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 바친 것이다.

 자, 이로써 천사옥대가 신라 왕실 금고에서 고려의 왕실 금고로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아래에는 재밌는 기록이 있다. 아래 기록대로라면 천사옥대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도 이어졌던 모양이고, 이후 이것이 조선왕조의 왕실 금고로 넘어간 모양이다. 그 후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에게 장가든, 영조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에게 이 옥대를 하사한 모양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제33권 고려의 금양전단품대(金驤栴檀品帶)에,고려 태조 20년(937)에 김 부(金溥)가 바친 옥대(玉帶)는 크기 10위(圍)에 62개의 장식판[銙]이 있는데, 곧 진평왕(眞平王)이 이른바 ‘성제옥대(聖帝玉帶)’라는 것이다. 대대로 나라의 진보(鎭寶)로 삼아오다가 400년 만에 바쳐진 것이다.

 복주(福州)는 지금의 안동(安東)인데,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여기에서 피하면서 전에 띠던 여지금대(荔支金帶)를 태사묘(太師廟)에 간직하였는데, 향리(鄕吏)로서 호장(戶長)이 된 자가 이것을 띠었으니, 이것이 고대(古帶)의 유래이다.

 금양전단대에는 운룡(雲龍)의 형상을 새겼는데 극히 정교하였다. 띠의 장식판 뒷면에는 ‘왕 씨 원년 추 칠월궁인 윤영화(王氏元年秋七月宮人尹英花)’라는 열두 글자로 된 관지(款識)가 있다. 이 띠는 궁중에서 금성위(錦城尉) 박 명원(朴明源, 潘南人)에게 하사하였는데, 박 명원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든 사람이다. 󰃁

(푸른 숲. 2012.12.29.)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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