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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39)황용사 장육존상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39. 황룡사(皇龍寺) 장육존상(丈育尊像)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황룡사(皇龍寺)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은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14년(556) 2월에 왕궁의 남쪽에다 자궁(紫宮)을 지으려 하였더니 그 땅에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불사(佛寺)로 고쳐 짓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14년 만에야 공사를 일부 완성하였다. 그리고 탑의 완공은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3월에 90여 년 만에 전부 완성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울산 곡포(谷浦)에 서축국(西竺國)에서 큰 배 한 척이 도착하여 봉서(封書)를 올리었다.

그 내용에는,

“서축국(西竺國) 아육왕(阿育王)이 황철 5만 7천근, 황금 3만근을 모아서 석가(釋迦) 삼존상(三尊像)을 만들려다가 실패하여 배에 실어 바다에 띄어 보내며, 비노니 인연(因緣) 있는 땅에 이르러 장륙존상(丈六尊像)이 되기를 축원한다.”

하였으며, 일 불(一佛) 이 보살상(二菩薩像)의 모형도 실었거늘 관리가 그대로 아뢰니 왕은 신하를 시켜 곡포 근처 깨끗한 땅에다가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삼 불상(三佛像)을 안치(安置)하였다.

 그 철과 금은 서울 경주에 가져다가 장륙존상 주조(鑄造)를 완성하였는데, 그 중량은 철이 2만 5천7근, 황금이 1만 1백36분(分)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백36분이 들었다. 세 불상을 모두 황룡사에 모셨으니 그 이듬해에 장륙존상이 눈물을 발꿈치까지 흘려 땅을 한 자나 적시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왕이 돌아가실 전조(前兆)이었다고 하며, 그 후 1238년 몽고군(蒙古軍)의 침입으로 아깝게도 화재로 인하여 이 불상은 없어졌다고 한다.

 

참고 자료

○ 신라 경주의 황룡사(龍寺)의 복원 연도 : 2035년

 2035년은 기념비적인 해이다. 한국불교의 초석이자 기둥이었던 황룡사(皇龍寺)가 복원되는 날이다. 1500년 전인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에서 진흥왕(眞興王)에 의하여 14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황룡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는 해이다. 그 웅장한 황룡사는 우뚝 솟은 높이 82m의 9층 목탑과 의젓한 높이 42m의 장육존상 불상의 절로서 주지는 “의상대사”이기도 했으며, “원효대사”가 백고강좌를 하여 사자후를 토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절이었던 만큼 신라, 멀리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왜의 사람들도 찾아와 예불하곤 하였다. 그 황룡사가 고려시대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몽고군에 의하여 불타버렸다.

 그 후 고려후기와 조선 그리고 근세와 현대를 거치는 가운데 황량한 절터인 사지(寺址)만이 남아서 자리를 지켰는데, 그것이 “황룡사복원프로젝트”에 의하여 2035년에 복원 된다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총아인 컴퓨터는 남은 주춧돌만으로도 절의 규모를 정확히 예측하게 하여 주고, 건축양식은 불국사가 있으니 만큼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절의 중심인 불상, 바로 장육존상인데, 이와 같은 것은 6세기 무렵 베트남의 절에 이미 있으니 이 또한 해결이 되는 것이다. 황룡사처럼 전쟁의 참화에 의하여 사라진 절은 전국에 1,000여 개에 이른다. 몽고군과 인진왜란의 왜군, 최근의 6.25동란이 주원인(主原因)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라(新羅)의 경주 황룡사(皇龍寺)였으며, 백제의 익산 미륵사. 고려의 원주 법천사, 또한 신라의 경기 회암사 등이다. 이들은 황룡사(皇龍寺)의 예에 따라서, 모두 복원의 과정에 있기도 하다. 그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웅장한 황룡사(皇龍寺)가 복원되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숨 쉬던 그 황룡사(皇龍寺)가 드디어 복원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2035년이다. 󰃁

(푸른 숲. 2012.12.27.)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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