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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37)분황사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37. 분황사(芬皇寺)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경주에서 동쪽 감포(甘浦)로 가는 길가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고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이다.

 신라(新羅) 시대의 번창한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은 그 당시의 9층탑이 3층탑만 남아 있어 엣 추억을 되살리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원효대사(元曉大師) 등 유명한 중이 많이 나왔다.

이곳 우물에 관한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 년 전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11년에 당나라〔唐國〕사신(使臣)이 신라 땅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가 간 일이 있다.

그 일행이 떠난 후 하루가 지나 내전(內殿)에 두 여인이 나타나서 허리를 굽혀 왕께 상소(上疏)하는 말이,

“왕께 삼가 아뢰나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에 각각 살고 있는 용(龍)의 처(妻)이온데, 이번 당나라의 하서인(河西人) 두 사람이 주문(呪文)으로 첩 등의 남편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 한 마리를 작은 붕어로 변장시켜 대통〔죽통, 竹筒〕에 가두어 가지고 돌아갔사오니, 원컨대 왕께옵서 두 사람을 머무르게 하시고 잔치를 베풀어 그 두 사람에게 우리나라의 세 용(龍)을 잡아가니 그 이유를 말하게 하소서.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큰 벌(罰)에 처겠다고 말씀하여 주옵소서. 이 세 마리 용(龍)으로 말하면 이 나라를 지키는 용들이오니 왕께서는 날랜 사신을 보내어 위기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왕(王)은 친히 신하를 데리고 하양관(河陽館)에 이르러 당나라 사신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인들의 말을 쫓아 말하니 양인(兩人)은 크게 놀라며 왕이 명군(名君)임을 탄복하고 그 대통을 왕께 받치니 왕은 곧 세 곳에 옮기었다. 붕어는 물속으로 헤엄쳐 가버렸는데, 이것을 본 당나라 사신은 귀국(歸國)하여 신라왕의 지혜로움을 아뢰고 다시는 이런 경망한 행동(行動)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분황사 우물은 탑과 같이 유명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 경주 분황사탑 - 국보30호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 터라고 전하는 칠처 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一然)이『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다.

경덕왕(景德王)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景德王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 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平章事) 한 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肅宗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聖人)인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 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는 모전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 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元聖王)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1974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분황사 모전 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傑作品)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석탑(石塔)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 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기단은 야석(野石)을 쌓아올린 단층으로 되어 있어 전탑 기단의 통식(通式)을 보여 주며, 그 중앙에 1층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화강암으로 한 층을 마련하였다. 탑신부는 길이 약 30∼45㎝, 두께 약 4.5∼9㎝의 진회색 안산암을 잘라 각층 옥신과 옥개부를 쌓아 올렸기 때문에 외형상 전탑과 같다.

 탑이 세워진 것은 분황사(芬皇寺) 창건(創建)과 같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으로 보고 있으며, 3층으로 되어있는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각종의 옥류(玉類), 가위, 은 바늘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중국(中國) 주화(鑄貨)가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리장치(舍利裝置)에 추가하여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을 넣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넓은 방형(方形)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1층 탑신(一層塔身)의 4면에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양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하는 인왕상(仁王像)을 조각(彫刻)하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조각의 걸작품에 속한다. 󰃁

(푸른 숲. 2012.12.25.)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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