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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35)천원사지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35. 천주사지(天柱寺址)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천주사(天柱寺)는 월성(月城)의 서북 임해전지(臨海殿址)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 절에는 괴이한 사검도 많았다.

 서출지(書出地)의 사건으로 제21대 소지왕(炤知王)의 화살에 죽게 된 중〔僧〕이 이절에 살았으며,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던 당시 이 천주사에 거동할 때 돌층계를 밟고 올라가려고 할 즈음 세 층의 돌다리가 두 쪽으로 깨어져 버렸다. 이에 놀란 좌우(左右) 신하(臣下)들이 왕에 가까이 가 고치려고 하였으나 왕은 좌우를 물리치고 말씀하시기를,

“이 돌층계는 기념(紀念)으로 이 대로 두게 하라!”

 하였더니 그 까닭으로인지 돌층계는 움직이지 아니한 채 보존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오부동석(五不動石)의 하나로서 당시는 임해전(臨海殿)에 보존 되어 있었는데, 그 후 없어지고 말았다.

 이 임해전(臨海殿)은 신라 문무왕(文武王)시대에 신라통일(新羅統一)을 한 기념으로 창건하여 그 동안 귀빈과 궁녀, 그리고 왕족의 놀이터며, 연회(宴會)장소요, 또 나라의 중대한 국사(國事) 회의장소 이었다.

 궁전에 딸린 안압지(雁鴨池)를 눈앞에 보고 갖가지의 화초(花草)와 금수(禽獸)를 기르며, 춘하추동 태평세월(春夏秋冬 太平歲月)을 보내던 곳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화려(華麗)하였다.

그러나 성자필멸(盛者必滅)이란 말이 있듯이 신라 56대왕 경순(敬順王) 5년(932) 2월 23일에 고려(高麗) 태조 왕건(王建)의 50여 기를 맞아,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한 후, 후백제 견훤(甄萱)에게 단한 선왕(先王, 景哀王)의 치욕을 하소연 하며, 또 그 후 왕건에 의지해 신라 천 년의 사직(社稷)을 물려준 마지막 회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1926년 경주군수 박 광열(朴光烈)의 발의로 임해정(臨海亭)이 세워져 지금도 못 동편에 있다.

1976년 봄까지 나온 유물은 기와 토기는 말할 수 없고,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이 17,600여 덤이나 출토(出土)되어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참고 자료

○ 명칭 :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臨海殿)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月池宮)”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 임해전지(臨海殿址)에서 출토된 유물들

 안압지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통일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 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통일 직후 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여러 개의 대문이 있는 규모가 큰 동궁을 새로 건설하였다. 안압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 동궁, 곧 임해전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건물터의 초석만 발굴되었다.

 임해전과 안압지에 대한 기록『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궁내에 못을 팠다는 기록이 문무왕 14년(674)과 경덕왕 19년(760)에 두 번 나타나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효소왕 6년(697)과 혜공왕 5년(769)에 있다. 또 소성왕 2년(800)에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손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해본다면 약 100년 간격을 두고 궁내에 못을 팠다는 것은 처음 판 못을 보수나 확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임해전은 그 못 가까이에 지어진 동궁이라 볼 수 있다. 또 임해문과 인화문이라는 것도 임해전을 중심으로 한 연못 정원의 담에 있던 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적어도 현재의 안압지가 조성된 연대는 문무왕 무렵 내지 그 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

 다만 『삼국사기』에 연못의 이름을 적지 않고, 궁 안의 못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이곳이 궁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건물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못해 폐허가 되어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안압지의 원명이 “월지(月池)”이고 동궁은 “월지궁”으로 불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안압지가 반월성 가까이에 있고 또 동궁의 위치가 연못 속에 비치는 아롱거리는 달을 감상하기 알맞다는 심증적 이유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안압지라는 현재의 이름은 거의 본래의 모습을 잃은 못가에 무성한 갈대와 부평초 사이를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다니자 조선의 묵객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못은 동서 길이 약 190m, 남북 길이가 약 190m의 장방형 평면이며, 면적은 1만 5,658평방미터(4,738평), 세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는 1,285m이다. 못가의 호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에는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으로 만들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여겨진다.

 못 속에 섬이 세 곳 있는데, 세 섬의 크기가 각기 다르고 윤곽선 처리가 자연스럽다.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삼신도(방장도, 봉래도, 영주도)를 본 딴 듯하다. 동쪽과 북쪽의 호안에는 무산 12봉을 상징하는 언덕들을 잇달아 만들어 놓았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3m에서 6m정도이며 선녀들이 사는 선경을 상징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조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북·남쪽 호안의 높이는 2.1m 정도이고 궁전이 있는 서쪽 호안은 5.4m로 좀 더 높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배려한 높이다. 못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다 깔았는데, 못 가운데에 우물 모양의 목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뿌리가 연못 전체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했다. 연꽃이 못에 가득하며 답답하고 좁게 보일 것을 미리 방지한 지혜이다.

 못물의 깊이는 약 1.8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의 시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입수부와 배수부이다. 입수 부는 물을 끌어 들이는 장치를 한 곳으로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으며 정원 못에 연결되어 있다. 동남쪽의 계류나 북천에서 끌어온 물을 거북이를 음각한 것 같은 아래위 두 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자연석 계단으로 흘러 폭포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래위 수조는 약 20c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넘친 물이 지표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넓적한 저수조를 만들었다. 위 수조에는 용머리 토수 구를 설치하여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운 자리만 남아 있다. 아래 수조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는 약 1.2m정도이다. 또한 물이 입수부의 완충수조를 지나 못으로 수직 낙하하는 지점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놓았는데, 이는 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물을 끌어들이는 데도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입수 부를 통해 들어온 물은 연못 안의 곳곳을 돌아 동북쪽으로 나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는데, 출수 구에서는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음을 알 수 있다.

안압지는 바라보는 기능으로 만들어진 궁원이다. 지척에 있는 무산 12봉이 아득하게 보이도록 협곡을 만들고, 삼신도와 무산 12봉 등 선경을 축소하여 피안의 세계처럼 만들었다. 지금도 외곽에 높은 담을 설치하여 경역을 아늑하게 만들고 갖가지 화초들과 새와 짐승들을 기르면 별천지 같은 깊은 원지의 생생함이 살아날 터이다.

 연못 서쪽과 남쪽의 건물터 등을 조사한 결과 건물터 26동, 담장 터 8곳, 배수로 시설 2곳, 입수부 시설 1곳 등이 밝혀졌다. 1980년에는 연못 서쪽 호안에 접하여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시켰으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하여 노출시켰다. 유물은 와전류를 포함하여 3만여 점이 나왔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향연 할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멸망하여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이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군이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 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 서쪽에 있는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궁중에서 사용했던 생활용기들을 비롯하여 나무배 등 700여 점의 대표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단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전시관 하나를 다 채운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부장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라 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금동 초심지가위는 초 심지를 자르는 데 썼던 길이 25.5cm 크기의 가위이다.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으며 손잡이 쪽에 어자문(魚子文)과 당초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금동삼존판불 안압지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들에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가운데 금동 아미타삼존판불의 본존은 화려한 연꽃의 2중 대좌 위에 설법인을 하고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허리를 한껏 휘어지게 하고 서 있다. 본존과 보살에 별도의 두광이 있고 이를 감싼 큰 광배가 전체를 연결하고 있어서 완벽한 삼존 구도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전기의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높이는 27cm이다.

 주사위는 우리나라 고대유물 중에는 목제품이 많지 않다. 토양이 산성인 탓에 땅에 묻혔던 것이 오래 보존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런데 안압지 바닥의 뻘 층에서 많은 목제품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14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는 잔치 때 흥을 돋우는 놀이기구이 일종인데 이것을 굴려 나타나는 면에 씌어진 내용에 따라 행동하도록 되어 있다. 내용 중에는 “술 석 잔 한 번에 마시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 등이 있다. 높이는 4.8cm이다.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 불단 같은 곳에 장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은 연꽃잎을 겹쳐서 조각한 8조각의 목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목심에 꽃과 나비 모양으로 얇은 은판을 오려붙이고 그 위에 옻칠을 한 뒤 무늬 부분은 칠 막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장식했다. 이러한 기법은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것이고, 또 이런 기법의 유물들이 일본 정창원에도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보상화 무늬전은 안압지 출토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와전류이다. 조각을 포함하여 2만 4천여 점이나 된다. 용도별로 보면 지붕위에 얹는 수막새, 암막새, 수키와, 암키와, 특수기와, 장식기와, 바닥에 깔거나 벽이나 불단 등에 장식되었던 전(塼) 등이다. 전 가운데 옆면에 당의 연호인 “조로 2년에 한지벌부에 사는 소사벼슬이 군약이라는 사람이 3월 3일에 만들어 납품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진 보상화 무늬전이 있다. 이 명문들은 전의 제작 연대가 문무왕 20년(680)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문무왕 19년에 동궁을 창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 주령구/ 위키백과

주령구(酒令具)는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이다. 재질은 참나무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출토된 진품은 유물 보존 처리도중 불타버렸고, 복제품만 남아있다.

 - 벌칙

① 금성작무(禁聲作舞) - 노래 없이 춤추기(무반주 댄스)

② 중인타비(衆人打鼻) - 여러 사람 코 때리기

③ 음진대소(飮盡大笑) -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원샷)

④ 삼잔일거(三盞一去) - 술 석 잔을 한 번에 마시기

⑤ 유범공과(有犯空過) -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있기

⑥ 자창자음(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⑦ 곡비즉진(曲臂則盡) -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러브 샷)

⑧ 농면공과(弄面孔過) - 얼굴 간지러움을 태워도(놀려도) 참기

⑨ 임의청가(任意請歌) -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⑩ 월경일곡(月鏡一曲) - 월경 노래 한 곡 부르기

⑪ 공영시과(空詠詩過) - 시 한수 읊기

⑫ 양잔즉방(兩盞則放) - 두 잔이 있으면 즉시 비우기

⑬ 추물막방(醜物莫放) - 더러운 것 버리지 않기

⑭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 스스로 괴래 만을 부르기 󰃁

(푸른 숲. 2012.12.23.)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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