ʊ이야기와 도시(話n都) - 新羅千年의 傳說 |
32. 주암사(朱岩寺) 주사암(朱砂庵)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약 16km 되는 여근곡(女根谷)의 남쪽이며 부산성(富山城) 앞에 있는 산내면(山內面)과 서면(西面)의 사이에 있다.
경주시 서면 건천역(乾川驛)에서 내려 약 5km 서쪽 산길로 가면 조그마한 절이 보이는데, 이것이 주사암(朱砂庵)이라는 옛날의 “주암사(朱岩寺)”이다.
이 절에 신라시대의 옛 이야기가 있다.
도(道)를 닦는 늙은 중이 어느 날 자신만만하여 큰 소리로 말하되,
“나는 무아무중(無我無中)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도통(道通)한 사람이다. 만일 나라를 기울일 만한 미인〔美人, 傾國之色〕이 있다 할지라도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귀신들은 몰래 대궐 안의 궁녀를 밤이면 데리고 나와 이 늙은 중 곁에 두었다가 새벽이면 다시 돌려보내었다. 이와 같이 매일 시각도 어기지 않고 계속하므로 궁녀는 겁이 나서 이 사실을 왕(王)에게 아뢰었다.
왕(王)은 궁녀에게 반드시 자고 돌아오는 곳에다 붉은 표를 해 놓도록 명하였다. 그러한 후 무사(武士)들을 시켜서 붉은 표를 찾도록 성 안은 물론이요, 곳곳마다 산골까지 샅샅이 조사하게 하였으나, 아무도 발견을 못하였다.
그런지 얼마 후에 이 바위 안에서 붉은 표를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무사들은 바위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본즉 늙은 중이 법의(法衣)를 입고 앉아 있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노하여 무사 수천 명을 보내어 늙은 중을 죽이려고 진군(進軍)한즉 늙은 중은 눈을 감고 신주(神呪)를 외우니 난데없이 수만 명의 병정이 산곡(山谷)에서 산악 같은 소리를 지르고 나타나며 날카롭게 왕의 군대를 물리치므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였다.
이 일을 안 왕(王)은 이제야 노승(老僧)이 범인(凡人)이 아님을 깨닫고 국사(國師)로서 모시었더니 그 뒤로는 궁녀들을 유인하는 일도 없으며, 유인하러 오던 귀신들도 다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고 한다.
이 부근에 가면 옛날 김 유신(金庾信)장군이 바위에서 밀로써 술을 빚어 부하(部下)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전하는 바위가 있고, 지금도 그 바위 위에는 당시의 흔적인 듯 병마(兵馬)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 곳 큰 바위를 지맥암(持麥岩)이라 하는 데, 이 바위에는 약 백여 명이 앉아 놀만큼 넓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밑으로 내려다보면 먼 산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 마치 학(鶴)을 타고 공중 은하(銀河)에 올라 온 듯 경치(景致)가 매우 좋다.
참고 자료 |
○ 경주 주사암(朱砂庵)과 마당바위(지맥석:持麥石)
주사암(朱砂庵)은 속전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주암사(朱巖寺)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학계(學界)에서는 신인종(神印宗)과 관계가 깊었던 사찰(寺刹)로 짐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이십일 경주부(慶州府) 고적조(古蹟條)에는 이 사찰(寺刹)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逸話)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주사암 창건 설화 1 : 서라벌의 밤이 깊을 때 반월성 대궐에는 모두 잠들고 파수병들만 삼엄하게 지키는 궁녀궁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임금이 가장 총애하는 궁녀를 안고 저 산 하늘로 날아갔다가 새벽에 제자리에 뉘어 놓고는 사라졌다. 궁녀는 그날 밤 꿈속에서 서쪽 하늘로 날아 어느 산꼭대기 동굴 속으로 들어갔는데 늙은 중 하나가 있었다. 이 늙은 중은 밤새 자기 곁에 가두어 두었다가 새벽녘에 귀신을 불러 도로 궁녀궁에 업어다 주고 내일 밤 다시 데려오너라.」라고 말했다. 궁녀는 아침에 깨어나니 꿈이었다. 이 꿈이 매일 밤 계속되어 임금에게 이 사실을 여쭈었더니 대단히 노하여 궁녀에게 일렀다. 나라 안에 대궐을 희롱하는 놈이 있다니 오늘 저녁 주사(朱沙)로 굴 바위에 표시를 하여 놓아라.」 이 말을 듣고 궁녀는 그날 밤 주사병을 굴 바위에 던져 붉게 물을 들여 놓았다. 그 이튿날 일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하지산(下地山 : 지금의 오봉산)을 뒤졌더니 오봉산 꼭대기 붉은 자욱이 물든 바위굴 안에 늙은 중이 있었다. 노승을 잡으려는 순간, 노승이 주문을 외우니 잠깐 동안에 수만의 신병(神兵)들이 에워싸고 군사들을 막았다. 날리는 깃발이며 활과 창이 절에 모셔놓은 팔부신중(八部神衆)과 같았다. 부처님이 비호하시는 스님임을 알고 임금은 그 노승을 모셔 국사로 삼았다. 그 후 이 바위 옆에 절을 지어 주사암이라 하였다.
○ 주사암 창건 설화 2 : 이야기는 신라 때의 일이라는 것만 알 뿐, 어느 왕 어느 공주에게 일어난 일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이 임금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아름답기 그지없는 데다 총명해 금지옥엽의 보살핌 속에 자라나고 있었다. 한데 그 공주는 주사를 늘 쥐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주사란 진사라고도 불리는 광물질로 선홍색을 띠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나는 빛깔 고운 보석이다.
어느 해 2월 공주는 부왕에게 복회(福會)에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나섰다. 사실 복회란 민간의 남녀가 자기 소원을 빌며 서로들 모여 줄기는 행사였지 공주같이 지체 있는 사람들은 기웃거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따라서 부왕이 이를 말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공주가 기어코 복회에 가야겠다며 떼를 쓰고 나서는 통에 임금도 별수 없이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바마마가 나에게 복회에 다녀오라고 허락을 내리셨다. 이제 네가 날 장소로 데려다 죽어야 한다. 알았지”하고 시녀에게 말했다. 공주는 이제 소문만으로 들어왔던 복회의 광경을 그리며 한껏 흥분된 나머지 시녀 앞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복회의 절정은 아무래도 초저녁이었다. 공주가 시녀의 손에 이끌려 산중턱의 절에 올라왔을 때 연등의 불빛과 군데군데 피워놓은 횃불에 사방은 대낮같이 밝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따뜻한 불빛의 영향도 있겠지만 일상의 찌든 삶은 간데없고 색동옷으로 차려 입은 처녀들과 한껏 멋을 내고 온 사내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넘쳐흘렀다. 공주는 저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빠져 탑돌이의 무리에 끼어들었고 얼떨결에 한 사내의 손을 꼬옥 쥐었다. 뒤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던 시녀가 “공주님, 공주님.”하며 어쩔 줄 몰라 했으나 그녀는 이미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선 뒤였다. 여러 사람 가운데 그녀는 콧날이 우뚝하고 늠름한 기상의 사내의 곁에 다가가 억세고 힘 있는 그의 손을 냉큼 잡았던 것이다. 부르르 떨며 손에 땀이 촉촉이 배는 편은 오히려 사내였다. 공주는 웃음으로 일단 낯설음을 녹이더니 더욱 손을 꼭 쥔 채 신바람이 나서 탑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얼마를 돌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탑돌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공주는 사내에게 거의 머리를 기댄 채 아직 황홀경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녀를 다그치는 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밤이 너무 깊었음을 감지한 사내가 이윽고 “아가씨 이제 우리도 돌아가야 할까 보오.”했다. 그제서야 공주는 정신이 돌아왔다. 황급히 사내의 손을 놓고 돌아서려는 공주의 뒤에서 사내가 덧붙였다.
“어느 집 낭자이신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만난 것도 삼생의 인연이라 생각하오. 즐거운 만남이었소. 이제 늦었으니 제가 바래다주면 어떻겠소.”했다.
공주는 부왕의 노여운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없이 산 아래로 내달았다. 그러나 초행인데다 시녀도 이미 돌아간 터라 공주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만 허기진 곰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이때 궁에서는 밤이 늦도록 공주가 돌아오지 않자 군사를 풀어 수색에 나서기로 했다. 근처 산을 샅샅이 살펴나가던 군사들은 근방의 굴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공주의 옷을 발견했다. 미루어 굴속의 곰에게 끌려들어간 게 틀림없을 것이니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기는 난망했다. 한편 공주의 행방불명 소식은 탑돌이를 같이 한 사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상대가 공주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그 공주를 어떻게든 찾아 살려내겠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산으로 내달았다. 곧 곰 굴 앞에 당도해 망설이고 있는 사람을 헤집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내가 그 속에서 찾은 거라곤 공주가 늘 지니고 다니던 주사뿐이었다.
탑돌이 할 적에 잠깐 그에게 보여주었던 그 현란한 빛의 주사만이 땅에 뒹굴드라며 사내는 눈물지으며 나왔다. 그는 임금 못지않게 공주의 죽음을 애통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때의 그 짧은 인연에 그토록 마음 아파한 까닭은 헤아리기는 어렵다. 한 순간의 인연으로 그치지 않을 둘만의 은밀한 약속이라도 있었는지. 아무튼 그 이후 사내는 공주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뒷날 임금은 주사가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짓도록 하는 한편 그 공주가 애지중지하던 주사를 부처님께 바치고 주사암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우리산 옛절』 김장호·김승호 지음)
○ 오봉산과 지맥석 : 신라인의 불국토이자 이상향이었던 경주.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더욱 특별하다. 경주의 산들은 그 산세가 웅장하거나 계곡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들이지만 산자락마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설화를 간직한 곳이어서 그 역사의 향기를 더듬으며 한 번쯤 올라볼 만한 산들이 많다. 일명 주사산(朱砂山), 부산(富山)이라 불리는 오봉산(五峯山) 역시 천년이 넘는 옛 설화를 찾아 떠나 봄직한 산이다.
그리고 그 오봉산 정상에 옛 설화를 간직한 주사암이 있다. 주사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지금처럼 주사암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부산성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은 성벽 바깥에 있게 부산성이 축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예언이 있었어도 신라가 멸망하기까지는 그로부터 수백 년이 더 걸렸다. 또한 이 주사암에는 여태까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不死處)라 이르고 있다. 그 뒤의 연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현재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 한다.
주사암 마당을 지나쳐 50m 정도 더 나서게 되면 이곳 오봉산의 명물인 마당바위 위에 올라앉게 된다.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산정 위에 우뚝 선 평탄한 반석으로 마치 멍석을 깔아 놓은 듯 한 암반으로 신라 김 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 마당바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자면 한여름엔 짙푸른 녹색의 바다, 가을엔 울긋불긋한 단풍의 향연으로 어지럽고, 안개라도 쌓이는 날엔 진정 속진을 떠난 듯 잠시 산 아래 세상을 잊어버리는 선경에 든다.
고려 명종 때 벼슬에 뜻이 없이 고향인 경주에 눌러앉아 159권의 문집을 남긴 김 극기가 주사암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멀고 먼 구름 끝에 절이 있으니
속진 떠난 경지가 거기 있구나.
새나 날아오를까 굽어 오른 하늘가에
봉수대가 바위 위에 올라앉았네.
○ 주사암(朱砂庵) : 영산전 -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서 조선시대 후기에 지었으며, 자연석으로 높게 올려 쌓은 석단 위에 세워졌다. 안에는 삼존불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화로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삼존불상은 18세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5)
(푸른 숲.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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