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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천년의 전설(38)황용사지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38. 황룡사지(皇龍寺址)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황룡사(皇龍寺) 터는 경주시 구황동에 있으며, 분황사(芬皇寺)의 남쪽 약 100m에 있다.

이 절에는 신라 시대부터 국보(國寶)인 장륙존상(丈六尊像)과 나무로 된 목탑 9층탑(木塔 九層塔) 그리고 에밀레종보다 43배나 큰 49만근의 큰 종〔大鐘〕, 그리고 화백(畵伯)인 솔거(率居, 박 솔거)의 유명한 벽화(壁畵)에 새가 날아 와 앉다가 떨어졌다는 『노송도(老松圖)』 등 보물이 많은 큰 절로서 유명했으나 불행하게도 몽고(蒙古) 병란시(兵亂時)에 소실(燒失)되었다.

 지금은 그 당시를 상상할 수 있는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29세 때 머리를 깎고 사문(沙門 : 중)이 된 절이며, 그가 법회(法會)를 열곤 했다는 큰 강당도 이제는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 자료

○ 황룡사(皇龍寺) / 위키백과.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善德女王)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命)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 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아비지는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꿈꾸었다. 아비지는 곧 의심이 나서 손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어두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곧 그 기둥을 세우고 노승과 장사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비지는 백제의 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 규모가 장대무비 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66.7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 황룡사 9층 목탑의 의미

 제1층은 왜(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의미하며, 이 탑을 건축하면 주변국들이 절로 신라를 섬길 것이라 하여 553년(진흥왕 14)에 늪지 2만 5,000평을 메워 공사를 시작해 646년(선덕여왕 15)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황룡사 장륙상(黃龍寺 丈六像)

 황룡사 장륙상(黃龍寺丈六像)의 규모는 『삼국유사』3권에 무게가 3만 5천근이며 금1만 198푼으로 본존상을, 철 1만 2천근, 금 1만 138푼으로 양협시보살을 구성하였다는 사실과, 『삼국사기』진흥왕 35년 조의 같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황룡사 금당지에 있는 큰 돌 3개는 곧 장륙3존상의 대좌로 추정된다. 이 대좌로 하여 추리하건대 유례없는 거대한 입상(立像)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

(푸른 숲. 2012.12.26.)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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