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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6)눈먼 어머니와 효녀 지은이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6. 눈 먼 어머니와 효녀(孝女) 지은(知恩)이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 전 신라 서울에서 일어난 이야기로서,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때 어느 봄날 서울의 금오산(金鰲山) 기슭 포석정(鮑石亭)에서 그 당시 여러 낭도(郎徒)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 모임에 지각(遲刻)하여 뒤 떨어져 온 낭도가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때에 계급이 높던 화랑(花郞) 효종랑(孝宗郞)이 그 두 사람에게 지각한 까닭을 물으니 낭도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분황사(芬皇寺) 동네로 지나오다가 어느 조그만 집에서 너무도 슬픈 울음소리가 나기에 그 집안을 들여다보니 한 이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가 눈 먼 어머니를 붙들고 통곡(痛哭)하는 지라, 그 이유를 동네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 분황사 동네에 연 권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 집이 몹시 가난하였다고 한다. 연 권이 오랫동안 신병으로 자리에 누워 앓고 있었으나 어린 딸 지은(知恩)이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아내의 힘을 입을 수도 또한 없었으니 그 아내가 눈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술 밥이 그들의 차지에 돌아오기 어려웠거든 하물며 한 방울의 약(藥)이야 바랄 수 있으랴. 그리하여 가엾은 연 권은 눈 먼 아내와 딸 지은이를 거친 이 세상에 모르는 듯이 남겨 두고 다시 못 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모진 것은 목숨이라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울고만 있기보다 끼마다 닥쳐오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는 눈 먼 어머니를 외로이 집에 남겨 두고라도 어린 딸 지은이는 거리거리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한 술, 두 술 밥이 그릇에 차기 전에 지은이는 바쁜 걸음으로 돌아 와 눈 먼 어머니와 마주 앉아 찬밥도 더운 듯이 쓴 장도 단 듯이 머근ㄴ것ㄱ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어느 부자 집에 고용살이로 들어 가 날이 저물도록 일을 하고 밤이면 돌아올 때 쌀을 조금씩 받아서 가져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게 되었다.

“어머니, 오늘 저녁은 밥맛이 좋아요? 어머니 많이 잡수셔요, 네?”

“오냐! 아가 너도 많이 먹어라. 하루 종일 얼마나 배고프고 괴로웠겠니?”

 이렇게 이야기하며 저녁밥을 마친 뒤에야 웃으며 그 날의 일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낙(樂)이었고, 새벽이 되기까지 서로 안고 깊은 잠을 이루는 것이 다시 얻지 못할 즐거움이었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한 술씩 얻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할 때 보다는 쌀을 되〔升〕로 받아 오고, 되를 모아 말〔斗〕로 받아다가 더운밥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어린 딸 지은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눈 먼 어머니는 항상 불쌍한 저 딸이 죄(罪) 많은 나를 위해서 땀 흘리며 애쓰는 것이 애처롭고 불쌍하여 딸 지은이가 나간 후도 홀로 눈물짓는 때가 많았다. 지은이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눈 먼 어머니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며, 어머니가 흑흑 흐느끼면서 울 때 지은이도 어머니 무릎 위에 엎드려 울면서 서로 윌 한다.

“어머니! 어머니, 이 하늘 아래서 어머니밖에 모실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하여도 어머니 마음이 편안하신 그것만이 소원이옵는데 저는 조금도 괴롭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우시면 저도 눈물이 납니다.”

“아가! 아가, 울리마라! 네 마음을 상하게 했구나.”

한즉 지은이 다시 말하였다.

“어머니 제가 하는 일은 조금도 힘들지 않으니 염려 마셔요.”

 이 말 한 마디에 어머니와 딸은 다시 한 번 같이 울었다. 딸은 눈 먼 어머니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울고 다시 울고 눈 먼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울고 또 울며 자기들의 신세를 한탄 한 것이 길가에 까지 들린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화랑 효종랑은,

“우리나라 서울에 불쌍한 사람도 많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 들은 지은이의 일이야 말로 참으로 눈물겹구나.”

하며, 조 백 석을 보내니 다른 여러 낭도들이 너도 나도 참여하여 조 천 석을 거두어 보냈다.

이 이야기가 드디어 궁중에까지 들어 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쌀 오백 석과 집 한 채를 주었으며, 그 효도를 표창한 후 그 동네 이름을 개칭(改稱)하여 효양리(孝養里)라하고 그들이 살았던 집은 절로 고치어 양존사(兩尊寺)라고 하였다.

 

참고자료

 우리나라 효자·효녀 다룬 책에서 지은의 얘기 빠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 신라뿐 아니라 효녀가 바로 지은이라 할만하다. 이 이야기는『삼국사기』열전8「효녀지은(孝女知恩)」과『삼국유사』효선(孝善) 9「빈녀양모(貧女養母)」에 나온다. 약간은 과장·미화·윤색이 있는 실화다.

○ 효녀 지은

-『삼국사기』내용

 지은(知恩)은 한기부(韓岐部) 백성인 연권(連權)의 딸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어머니를 모셨는데, 나이 32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 근데 먹 거리가 떨어져 품도 팔고, 밥도 얻어 어렵사리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나 너무도 지쳐 끝내는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쌀 10여 석을 얻었다. 하루 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면 밥을 지어 어머니께 드렸는데, 이렇게 3∼4일을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아도 맛은 예전과 같지 않고, 속을 칼로 에∼는 것 같으니 무슨 일이냐?”그러자 지은이 사실대로 말했고,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으니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큰 소리로 울었다. 지은도 어머니를 안고 함께 우니 길가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모두들 슬퍼했다.

 그 때 그 앞을 지나던 효종랑(孝宗郞)이 이런 모습을 보고 부모에게 부탁해서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줬다. 또 지은의 주인에게 곡식을 갚아주고 다시 그녀를 양인으로 만들어 줬다. 그러자 효종랑의 낭도(郎徒) 수천 명이 곡식 1석씩을 거둬 모녀에게 줬다. 이 말을 들은 왕도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부역까지 면제해 줬다. 그리고 도둑이 들까 염려해 군사를 보내어 지은의 집을 지키게 하고, 그 마을을 효양방(孝養坊)이라 불렀다. 또 당나라에도 표문(表文)을 지어 올려 이 미담을 알렸다. 왕은 효종랑을 칭찬하며 헌강왕의 딸과 결혼시켰다.

-『삼국유사』내용

 효종랑이 남산 포석정에서 놀 때 문객(門客)들이 서둘러 왔는데 두 명이 늦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20살쯤 되는 처녀가 눈먼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사연을 들어보니, 집이 가난해 밥을 빌어 어머니를 몇 년 동안 모셨는데, 흉년이 들어 밥을 얻기 어려워지자 남의 집에 품을 팔아 30석의 곡식을 얻어 주인집에 맡기고 일을 했답니다. 근데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가, 옛날에는 밥은 거칠어도 맘은 편안했는데 요새는 밥이 좋은데도 간장을 도려내는 듯 맘이 불편하니 무슨 까닭이냐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딸이 이실직고 했고, 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답니다.”

이 말을 들은 효종랑은 눈물을 흘리며 곡식 100석을 보내고 그의 부모도 옷 한 벌을 보냈으며, 그의 무리 1,000명도 곡식 1,000석을 거둬 지은 모녀에게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도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군사를 보내 그 집을 도둑들로부터 지켜줬으며, 그 마을을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이후 모녀는 그 집을 바쳐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이름 붙였다.

효녀지은설화(孝女知恩說話) - 신라시대의 효행설화.

『삼국사기』권48에 기록되어 있다. 한기부(韓岐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 지은은 효심이 지극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느라 32세가 되도록 시집가지 않고 동냥을 하여 극진히 모셨다. 생계를 잇기가 어려워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어 쌀 여남은 석을 얻었는데, 낮에는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고 밤에는 돌아와 밥을 지어 봉양했다. 3, 4일 후 어머니가 “전에는 밥이 나빠도 맛이 좋더니 지금은 밥이 좋아도 뱃속을 칼로 에이는 듯하니 어쩐 일이냐?”라고 했다. 딸이 사실을 고하니 어머니는 “네가 나 때문에 종이 되었으니 빨리 죽느니만 못하다.”라고 하고 둘이 목 놓아 울었다. 지나가던 효종랑이 이를 듣고 감동을 받아 부모에게 청하여 쌀 100석과 옷을 보내주고 지은을 종으로 산 집에 몸값을 갚아 주었다. 이에 화랑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1섬씩을 내었고 임금도 벼 500석과 집 1채를 주고 일체 부역에서 면제해 주었다. 쌀이 많으니 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병사를 보내 지키게 했고, 그 마을을 표창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고 표문을 올리니 이 미행이 당나라에까지 전해졌다.『삼국유사』권5에도 이와 같은 설화가 실려 있는데 제목은『빈녀양모(貧女養母)』이며, 주인공의 이름은 없고, 빈녀(貧女)라고만 되어 있으며 효종이 직접 본 것이 아닌 전해들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나라에서 받은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으며 그 이름을 양존사(兩尊寺)라고 했다고 했다.『삼국유사』지은이인 일연의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가난뱅이 여인 효녀 지은

 효종랑(孝宗郞)은 제3 재상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낭이 남산 포석정에서 한바탕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베풀고자 했다. 소문을 들은 문객들이 모두 황급히 달려왔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내는 술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꾼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자리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생각하며 기다렸더니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다.

 두 사람은 효종랑이 묻기도 전에 그 까닭을 말한다. 그 이야기가 나중에『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되었다. 물론 『심청전』은 이 설화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거타지 이야기라든가 개안(開眼) 설화, 인신공희(人身供犧)설화 등이 두루두루 『심청전』의 탄생을 위해 여러 모로 기여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설화는 바로 이 효녀 지은 설화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면 이제 지각한 두 술꾼들의 늦은 사유를 들어보자.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지은(知恩), 한기부(韓岐部) 사람 연권(連權)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눈이 먼 어머니를 봉양하고 사느라고 이모지년(二毛之年 : 32세)이 되도록(신증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열전의 경우. 유사에서는 20세라고 함.) 시집도 가지 못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집이 워낙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기도 하면서 봉양했다. 그러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설상가상으로 흉년마저 들었다. 걸식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 할 수 없어 쌀 10여 섬(유사에서는 30섬)을 받기로 하고 부잣집의 종이 되었다. 온 종일 주인집에 가서 일을 하고 늦게야 부랴부랴 돌아와서 밥을 지어 봉양하고는 새벽이면 다시 부잣집으로 일하러 가곤 하였다.

이렇게 3∼4일이 지나자 어머니가 딸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

“강비(糠粃 : 겨와 쭉정이, 곧 거친 식사)를 먹던 지난날의 식사는 비록 거칠긴 하였으나 밥맛이 달고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에는 쌀밥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밥맛이 좋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창자를 찌르는 듯하니, 어쩐 일이냐?”

지은이 할 수 없이 이실직고하였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나 때문에 너를 남의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내가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에 딸도 함께 울어 그 슬픔이 길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지나가다가 이를 본 효종랑의 두 문객이 물었다.

“어째서 그토록 슬피 우는 것이오?”

지은은 일의 전말을 소상히 말하면서 더욱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저는 이제껏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있었을 뿐, 색난(色難 : 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에 맞게 봉양하기는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구경하느라고 늦었다는 말을 들은 효종랑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그의 낭도 수천 명도 각각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도와주었다. 진성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租) 500섬과 집 한 채를 내리고 정역(征役)의 구실도 면제시켜 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군사를 보내어 교대로 집을 지키게 하고 그 마을을 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후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고 한다.

한편 왕은 효종랑을 두고 말하였다.

“그는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노성(老成)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의 오빠인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니, 효로써 가난을 벗어나 눈 먼 어머니를 잘 봉양할 수 있게 된 것은 효녀 지은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던 효종랑도 함께 복을 받게 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이 웅재 동원대 교수》 󰃁

(푸른 숲. 2012.11.24.)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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