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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7)김 후직의 간묘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7. 김 후직(金后稷)의 간묘(諫墓)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현재 경주역에서 북으로 가면 가까운 숲, 지금 경주의 공설운동장이며 가장 경치가 좋고 공기 좋은 논호림(論虎林), 일명 고성 숲이 있다. 여기에서 북으로 약 200m 가면 밭 복판에 고분(古墳)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김 후직(金后稷) 충신(忠臣)의 무덤이다. 거기 세운 비석은 약 300여 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보면, 신라시대의 일이다. 26대 진평왕(眞平王)이 나라의 일을 소홀히 하고, 다만 매일같이 사냥으로 날을 보내므로 김 후직은 여러 가지로 말씀을 드렸으나 도무지 듣지를 않으시고 도리어 윗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관직(官職)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김 후직은 정사(政事)를 걱정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기〔臨終〕에 이르렀다.

그 때 그 김 후직은 자손들에게 죽으면서 유언(遺言)하기를,

“나는 신하(臣下)로서 마땅히 할일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니 죽은 뒤에 장사(葬事)를 예법(禮法)에 갖추어서 잘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임금님께서 사냥 다니시는 길 가에다가 묻도록 하여라.”

 그의 아들들은 이 말과 같이 돌아가신 후 임금님이 매일같이 사냥 다니는 길가 밭에다 묘(墓)를 썼다.

 임금님이 지난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사냥하러 말을 달리는 데 김 후직의 묘 앞에 이르러 돌연 말이 걸음을 멈추는 데 어디서인지 이상한 말이 들렸다.

“(소리)임금님께서는 부디 사냥을 말아 주십시오!”

 거듭거듭 들리었다. 왕은 이상한 소리에 놀라며 그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았더니 그 소리는 바로 김 후직의 무덤에서 들리었다. 그 후 왕은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이며, 죽어서도 나라 일을 걱정하던 소리를 듣게 되자,

“그는 살아서는 충신(忠臣)이었고, 죽은 뒤 영혼(靈魂)까지도 충간(忠諫)하는 충신이니 내 어찌 그대의 말을 쫓지 않으랴!”

 하고 다시는 사냥을 다니지 않고 나라의 일〔政事〕에 힘을 썼다고 하는 데 후일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 묘를 “신라 간신(新羅諫臣) 김 후직묘(金后稷墓)”라는 비석(碑石)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 경주 간묘〔慶州 諫墓, 新羅 兵部令 金后稷의 墓〕: 경주 간묘의 비석을 세운 사람은 경주부윤 남 지훈(南至薰)이다. 기축년(己丑年 1709) 7월에 부임했다. 그는 2년 남짓 재임하면서 종래, 부 선생안(府先生案)을 새로 편성하고, 김 유신(金庾信) 묘에 비도 건립했다. 그리고 김 후직 묘 곁에‘신라간신김후직묘(新羅諫臣金后稷墓)’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의 전문을 옮겨 적는다.

 

新羅諫臣金后稷墓

 

신라간신김후직묘

 

동경지(東京誌)를 보면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자 공이 간했으

 

나 듣지 않았다. 공은 죽음에 임해 그 아들에게“내가 살아서

 

임금님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 죽으면 내 뼈를 임금님이 다

 

니시는 사냥 길 곁에 묻어라.”라고 말했다. 왕이 사냥을 나갔

 

다가 어느 무덤에서 “왕이시여 사냥을 가지 마시옵소서.”인

 

듯한 소리가 들렸다. 왕은 전후사실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며 마

 

침내 다시는 사냥을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묘간

 

(墓諫) 이라고 불렀다. 아! 슬프다. 죽어서도 임금의 잘못을 간

 

했던 사람은 천 년 역사에 오직 사어(史魚)일 뿐이다. 그러나

 

묘간은 사어에 비한다면 더욱 열렬한 충간이다. 고금에 전해오

 

는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잡초 우거진 길 가에 작은 비석조차 없다. 꼴 베는 아이

 

들이 무덤에 올라가 놀며, 불을 질러도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여기 몇 글자를 적어서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려 한다.

 

경인년(庚寅年 1710) 겨울에 부윤 의령 남 지훈(南至薰)이 짓

 

다.

 

 사어(史魚)는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의 충신이다. 그런데 김 후직의 무덤을 일반적으로 ‘간묘(諫墓)’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묘간(墓諫)”이라 했는데, 이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간묘라 하면 충간을 하다가 죽은 자의 무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지만, 묘간이라 하면 죽어서 무덤에 갔어도 간했다는 말이다.

※ 김 후직은 신라 지증왕(智證王)의 증손(曾孫)으로 진평왕(眞平王)을 섬겨 이찬(伊飡)이 되고,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다. 󰃁

(푸른 숲. 2012.11.25.)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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