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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8)삼기종과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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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8. 삼기종(三奇鐘)과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鐘)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신라 시대에 유명한 삼기종이 있었다. 그 중 제일 큰 종이 황룡사 종이요, 길이가 약 3m, 두께가 약30cm, 무게가 29만 4천kg〔49만7천5백 81근(斤)〕이나 되었고, 그 종소리는 기묘하였으며, 지금 남아 있는 신종(神鐘,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보다도 약 4배나 더 무거운 큰 종이었다 하니, 오늘날까지 이 종이 있다면 그 얼마나 우리나라 예술계에 찬연하며 자자손손 만방에 자랑으로 빛날 것이냐?

 애석하게도 왜인〔日本人〕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 종을 보고 탄복하여 일본으로 가져 가다가 동해에 뱃사람 할 것 없이 다 침몰되었다고 전하여 지금도 파도(波濤)소리에 따라 종소리가 울려온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는 돌 종〔石鐘〕으로 소리가 기묘한 것이라 한다. 이 종도 지금은 흔적조차 없으나 그 종의 이야기는 돌 종란에 미루고 남은 종, 즉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아 있는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鐘)이다. 서기 1972년(단기4260년) 5월 21일 독일 국립박물관에 계셨고, 세계적 고고학자(考古學者)인 “겐멜”박사가 이곳 경주에 와서 이 종을 보고 감탄하여 발하기를,

“이것은 세계 제일이다. 독일에 이런 종이 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능히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고 말하고 간 것을 보더라도 이 종이 얼마나 훌륭한 종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그 종의 특징이나 구조는 그만 두고 이 종(鐘)이, 34대 효성왕(孝成王, 聖德王 二子) 아우이신 경덕왕(景德王)이 35대 임금으로 왕위에 오르시어 선왕(先王, 33대 聖德大王)의 뜻을 이어 큰 종을 봉납하였으나 성공을 못 보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景德王 嫡子)이 선왕의 뜻을 받아 6년이나 걸려 혜공왕 7년 12월에 이 종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이 종을 만들어 내기까지에는 세 임금과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으며, 서기 771년(단기3104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종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몇 번이고 고쳐 만들었으며 허다한 곡절이 있었다. 있는 재주와 있는 힘을 다하여 만들어 놓으면 큰 금이 가기도 하고, 혹은 소리가 나지를 않기도 하고 또 소리는 나도 둔탁한 소리가 나서 종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만들고, 부수고 또 다시 만들고 또 부수기를 거듭하였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장은 피로와 근심으로 핏기가 없고, 국왕(國王)은 국왕대로 노하였다. 백성(百姓)들은 이 무슨 흉조(凶兆)인가하여 수군수군하였다. 이 때 공사를 맡은 이 상택 일전(里上宅一典)은 고민과 한숨 중에 완성시킬 기일이 내일로 박두하였다. 일전에 일찍이 황룡사의29만 4천kg(즉 49만근)이나 되는 큰 종을 무난히 주조한 인물이며, 국내 제일의 명공(名工)으로 자타가 인정 하는 바 만들어진 유래를 소개함으로써 이 종이 신기하고 훌륭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제34대 효소왕(孝昭王)이, 돌아가신 부왕 33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봉덕사(奉德寺)를 지으시고 주종(鑄鐘)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 이제는 이 세상에 자기 기술의 부족함이 폭로됨은 물론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는 죄송스런 마음에서 벌을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날 생각도 한 두 번이 아니요, 수심 깊은 안타까운 마음 고민과 피로에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전의 집에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있는 누이동생이 가난한 오빠의 집에 돌아 와 쓸쓸하고 외로운 세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부터 오빠를 생각하는 누이는 그 종의 완성이 속히 되지 않은 것은 오직 복 없는 자기가 와서 있는 부정이 아닌가하여 밤낮 으로 걱정이 되며, 혹은 여자의 힘으로 어떻게 왕의 힘이 될 수는 없을까 날마다 저녁때면 시름없이 맥이 풀려 돌아오는 오빠를 볼 때마다 민망하고 안타까운 생각에 마음을 태우고 항상 우울한 심정으로 오늘도 오빠를 보내고 걱정하고 있었다. 때마침 노승이 와서 시주(施主)하기를 권하는 지라 그 때 노승에게 걱정 끝에,

“대사님 혹시나 봉덕사종이 완성되면 무슨 묘한 방법이라도 아시오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노승이 대답하되,

“그 공사(工事)에는 인주(人柱)가 꼭 필요하오. 순결한 여아(女兒)를 인주로 세우지 않고서는 그 공사는 이루지 못할 것이오.”

 이와 같이 말한 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중이 사라진 후 이 여자의 가슴은 큰 자극을 받아 그는 백 가지, 천 가지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나 세상에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 인주이다. 부모가 되고 자기 자식에 대한 자애심은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불문하고 다 귀중(貴重)한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깊이깊이 생각한 나머지 최후에 비참한 결심을 하여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을 인주로 바칠 것을 결심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빈곤과 싸우면서 오로지 오늘날까지 살아 온 것은 오직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남겨 주고 간 “봉덕(鳳德)이”를 생각하고, 그 장래를 기대하며 유일한 낙으로 애정을 다하여 양육에 힘쓴 것이다. 이것이 그 여자의 생명이며, 자기가 가진 이 세상에서 사는 전부였던 것이다.

“봉덕아! 네가 외숙부를 위하고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를 위하여 이 불쌍한 어미를 위하여, 그 보다도 임금님을 위하고 만백성들의 근심을 풀기 위하여 신종의 인주로 네 몸을 바쳐라! 이 어미가 간청한다.”

하니, 다섯 살 된 어린 봉덕은 그 뜻을 알았는지 다만 머리만 끄덕끄덕하며 승낙의 표시인 듯 물끄러미 어머니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띤다. 그 어머니는 마음을 목석(木石)같이 굳게 하고, 그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전과 다름없이 기운을 잃고 오빠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이끌고 파리한 몸으로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 왔다. 말이 없어도 종(鐘)이 잘 안 됨을 짐작하였다. 그는 곧 오라버니에게 오늘의 내력 전부를 일일이 고한 후 딸을 바칠 것을 말하였다. 오빠는 깜짝 놀라며 거절하였다.

“우리 남매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누구보다도 눈물과 파란곡절이 많았다. 너에게는 없어서 안 될, 단 하나의 무남독녀(無男獨女)인데 어찌 인주로 하랴! 차라리 내가 죽을지라도 못한다.”

하면서 반대를 하였다.

“오라버님! 오라버님, 오빠 없는 이 세상에 이 몸은 누구에게 의지를 하고 산단 말이요, 오빠가 희생되면 우리 두 목숨은 어찌 되오리까? 우리 집은 멸망이 아니고 무엇이 되며, 하루인들 어찌 산단 말이요? 부디, 부디 이 동생 말을 들어 주세요!”

하고 너무나 간곡한 청이기에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이튿날 봉덕을 목욕시켜 제사지내고 마지막으로 안아 보았다. 무심한 봉덕이는 방글방글 웃고 엄마∼, 엄마∼를 부른다. 사랑하는 내 딸을 희생시킬 생각을 할 제 그 어머니의 가슴 어떠하였으랴.

 그러나 한 번 결심한 일, 어린 봉덕에게 최후로,

“봉덕아! 어머니를 원망해라! 너는 나와 너의 외삼촌을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부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니 그리 알고 잘 가거라.”

하고 구슬 같은 눈물을 씻으며, 쇳물이 펄펄 끓는 도가니에 던져 넣고 말았다.

 그 때 봉덕은 에∼밀∼레! 에∼밀∼레! 부르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신기롭게도 이번에 만든 종은 훌륭한 종(鐘)이 되었다. 시험 삼아 종을 울리니 그 소리는 그윽하고 애련한 울음, 마치 그것은 봉덕이가 에∼밀∼레! 에∼밀∼레하고 부르는 처량한 소리와도 같이 들려 왔다. 여러 사람들은 옷깃을 가다듬어 죽은 봉덕이의 명복(冥福)을 빌며 합장(合掌) 재배(再拜)하고 종소리가 끝나도록 헤어질 줄 몰랐다고 하며,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만인(萬人)이 소원하던 신종(神鐘)이 완공되어 신라 시대는 물론 우리나라의 훌륭한 자랑거리를 세계에 알리고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참고 자료

○ 성덕대왕신종(神鐘) 관련 신라 왕조 참고

在位

代數

王號

王號,名

父 및 輩行

在位

年數

后妃

備考

702

33

聖德王

金氏

隆基

興光

神文王 次子

神穆王后金氏

35

金氏 蘇判 元泰 女

朝陽洞

737

34

孝成王

金氏

承慶

聖德王 二子

炤德王后

5

惠明王后 朴 氏

 

742

35

景德王

金氏

憲英

聖德王 三子

24

伊飡 順貞 女

滿月夫人 新寶王后 先妃 神巴夫人

內南面

鳧(부)池里

765

36

惠恭王

金氏

建運

景德王 嫡子

滿月夫人金氏

舒弗邯義忠女

15

伊飡 維誠 女

后妃 昌昌夫人

 

 

古老의 口傳 봉덕사(奉德寺)의 종 傳說

“봉덕사의 종”

 

 옛날부터 내려 온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러한 전설이 돈다.

 이 종을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중들이 전국 각처로 헤어져 거국적(擧國的) 시주(施主)를 거두러 나가서 방방곡곡(坊坊曲曲)으로 흩어져서 몇 달을 두고 다니는데 그 중 어느 한 분이 어느 촌락(村落)에 들어가서 시주를 권한즉 어느 젊은 여자가 어린 딸아이를 업고 나서,

“옥동자냐? 금동자냐? 둥둥 내 사랑아!”

하면서 시주할 곡식도 없고 돈도 없는 참으로 구차한 가정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주할 생각으로 ‘우리 집은 가난하여 아무것도 시주할 힘이 없으니 우리 봉덕이나 시주할까? 둥둥 내 사랑아!’하면서 어린애를 어루고 있었다. 그 때 중이 어린 아이를 보니 참으로 잘 생기고 누가보아도 귀엽고 복스럽게 생겨서 사랑하고 싶었으며, 또 그 이름이 하필 “봉덕(鳳德)이”라 하기에 이상하게 들렸다.

 그 후 봉덕사(奉德寺)에서는 종 만드는 데 여러 번 실패하자 누구의 말인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문에 종(鐘)이 되는 데는 끓는 쇳물에 산 아이, 특히 순결한 여아(女兒)가 인주(人柱, 삼국시대에 큰 공사를 할 때에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관습)로 들어가야 종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인주란 것은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니다. 여러 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자, 무슨 연유가 있는지 하고 시주 권하러 다니는 중을 전부 집합시켜 놓고 큰 회합을 열어서 권선 다니는 중에 이상한 말이나 눈으로 본 것을 일일이 보고 하도록 했다. 그 중에 한 노승(老僧)이 보고하되,

“어느 농촌 부락으로 시주를 권하러 간즉 집집마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다 시주하는데 그 중 한 집에 간즉 ‘워낙 구차하니 시주할 아무 힘이 없다면서 등에 업고 있는 아이를 어르면서 단지 하나뿐인 봉덕이나 줄까 둥둥 내 사랑아!’하면서 이름마저 봉덕이라고 합디다.”

그러한 보고를 듣고, 경솔히 말한 그 집을 다시 찾기로 하였다.

 그래서 봉덕이 봉덕사종의 인주로 종을 만드는 펄펄 끓는 쇠 도가니에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쇠 도가니에 들어 갈 때 어머니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가 에∼밀∼레∼, 에∼밀∼레∼ 하는 발음으로 전하여 슬픈 음성을 남기게 된 것이란 전설도 있다. ?

(푸른 숲. 2012.11.26.)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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