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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4)약사여래상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4.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이 약사여래상은 지금은 박물관에 있으나 원래 백률사(栢栗寺)에 있던 불상이다. 이 불상(佛像)의 영험에 대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 때에 대현살찬(大玄薩飡)의 아들 부 례랑(夫禮郞)을 선발하여 국선(國仙), 즉 화랑(花郞)으로 삼았다. 낭도(郎徒)는 약 천 명가량 되었으나, 그 중에 절친한 동무는 안 상(安常)뿐이었다.

 부 례랑은 어느 날 낭도를 데리고 여행을 갔다가 북쪽 국경지대에 이르렀을 때 돌연 적병(賊兵)을 만나 그들에게 사로 잡혀 가게 되었다.

 낭도들은 모두 겁을 내어 도망쳤는데 안 상이 홀로 동무의 신변을 생각하고 그 뒤를 따랐다. 이것은 서기 693년, 즉 효소왕 2년 3월 11일이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한탄하며 말하되,

“선왕(先王)이 신적(神笛)과 현금(玄琴)을 얻어 천존고(天尊庫)에 비장(秘藏)하시고, 세상 모든 재액이 없어진다 하시었는데, 오늘날 국선을 도적에 사로잡힌바 되니 이 어인 일인고?”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현존고에는 서운(瑞雲)이 덮이는지라 왕은 또한 놀라 곡간 안을 조사시켜 본즉 국보(國寶)인 거문고와 저〔笛〕, 둘 다 없어졌다.

왕은,

“아아! 국선을 잃자, 국보를 잃었으니 짐의 부덕(不德)의 망극함이여!”

라 하고 슬퍼하는 한편 사고리(司庫吏) 김 정고(金貞高) 등 다섯 명을 가두고 말았다.

4월에는 하는 수없이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이 공표하였다.

“거문고와 저〔笛〕를 찾는 사람에게는 한 해의 조(租)를 상으로 주겠다.”

하고 널리 공표하였으므로 국내는 매우 소란하게 되었다.

 부 례랑의 양친은 날마다 백률사 약사여래 불상을 찾아가 기도를 올렸는데 5월 15일에 또한 성심으로 기도를 올리다가 본즉 향탁(香卓) 위에 분실된 국보 거문고와 저가 얹혀 있고, 여래상 뒤로부터 부 례랑과 안 상이 나오므로 양친은 한 편 놀라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여 어찌된 연고를 물었더니 부 례랑이 답하기를,

“제가 적에게 사로잡혀 가서 대도구라(大都仇羅)라 하는 집의 마소를 먹이는 종이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라 하는 들에서 풀을 먹이고 있었더니, 용모가 거룩한 노승(老僧)이 손에 거문고와 저를 들고 가까이 와 하시는 말씀이 ‘고향이 그리우냐?’하시기에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앉으며, ‘임금님과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하루가 천추(千秋)같습니다.’하고 쓰러져 애원을 하였더니, ‘그러면 나를 따라 오라!’하기에 그 뒤를 쫓아가니 어느 바닷가에 이르러 안 상(安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승이 저를 쪼개어 배 두 척을 만들어 주므로 우리는 각각 한 척씩 타고 노승은 거문고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습니다.”

 양친은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반가와 하면서 사자를 시켜 부 례랑과 안 상을 맞이하고 백률사에는 패금(佩金)을 내리고 국내에는 은사(恩赦)를 내리는 동시에 3년간의 조세를 경감하였다.

 그리고 부 례랑은 대각간(大角干)으로, 그의 부친 아찬대현(阿飡大玄)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모친 용보부인(龍寶夫人)을 사량부(沙梁部) 경정궁주(鏡井宮主)로 봉하고, 안 상을 대통(大統)으로 삼았으며, 5명의 사리고는 면죄할 뿐 아니라 각각 벼슬 5급을 올려 주었다.

그 후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방에 비치고 17일은 서방(西方)에 비치니 일관(日官)이 점을 쳐 아뢰기를,

“금적(琴笛)에는 어찌 벼슬이 없었나이까?”

 하기로 곧 신적(神笛)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더니 그제야 혜성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 약사여래상은 조상(彫像)의 명수(名手)로 존경 받은 당나라 사람의 작품이라 하는데, 그의 이름은 알지는 못하나 그 재능의 비범(非凡)과 인격의 고결(高潔)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모두들 “신장(神匠)님”이라고만 불렀다.

 이 신장님이 어찌하여 신라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또, 남아 있다.

그 당시 당(唐)나라 황제에게 천하일색인 어여쁜 따님이 있었다. 꽃과도 같고 달과도 같은 딸의 모습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고자 우수한 화공(畵工)을 뽑아서 그 모양을 그리기로 하였는데 그 영광에 뽑힌 자가 바로 신장님이었다. 신장님은 전력을 기울여 아리따운 공주의 모습을 그렸었다. 그림이 공주와 다름없이 아리따움에 따라 신장의 마음속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신장은 완성된 그림에다 자기도 모르게 화필(畵筆)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게도 붓 끝은 공주의 배꼽 밑에 떨어져 점을 찍고 말았다. 신장은 당황하여 붓을 들어 그 점을 없애려고 애를 썼으나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다시 그리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이만큼 그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붓을 들고 싶지도 않았다. 신장은 ‘화운(畵運)이 이뿐인가 홀로 탄식하다가 지워지지 않는 그 자리에 필시 험이 있는 게로구나.’ 결심하고 황제께 그대로 그림을 올리었다. 황제께서는 그림을 받아보더니 대단히 만족하여,

“과연 내 딸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그맣게 다문 입, 정기가 빛나는 까만 눈동자, 도화색 같은 뺨, 그런데 이것은 웬 일이냐? 내 딸 배꼽 밑에 있는 험은 그 누가 알았으며, 누가 그리라고 하였더냐? 네가 그리 잘 안다면 간밤 몽중(夢中)에서 내가 본 사람의 모습을 그려 들여라.”

엄명을 받고 신장은 십일면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을 그려 바쳤더니 바로 맞았으나 조금도 노염이 풀어지지 않았는데, 좌우에 있던 대신들의 조언(助言)으로 용서를 받게 되었다.

난경(難境)을 넘은 신장님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대궐을 나오는데,

“여보게! 이 사람!”

하고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았더니, 그는 다정한 친구인 박사 분절(芬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만나려던 참일세. 마침 잘 만났네. 나는 이번에 혼이 다 빠져서 느낀 바도 많았네. 대관절 우리나라는 대국이라면서 인심이 너무나 협착한데, 듣건대 신라(新羅)는 비록 작은 나라이면서도 인심이 모두 부처님 같고, 기술가진 사람이면 더욱 환영한다 하니 나는 그 땅에 가 살고 싶은데 자네도 같이 가지 않으려나?”

 이렇게 두 사람은 신라(新羅)에 왔다고 한다. 󰃁

(푸른 숲. 2012.11.22.)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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