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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2)백결선생과 음악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2. 백결(百結)선생과 음악(音樂)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신라 시대 낭산(狼山) 기슭에 아주 구차한 선비 음악가가 살고 있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옷〔衣服〕을 백 군데나 기워 입고 다니기에 별명이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되었다.

 평소에 욕심이 없고 법이 없어도 사는 착한 분이다. 항상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타기에 거문고라면 백결선생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괴로울 때나 불평이 있을 때도 언제나 거문고를 탔다고 하는 데, 어느 해 그 해도 저물어 갈 무렵 이웃에서는 떡 찧는 방아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왔다. 그러나 백결선생 집에는 떡은 고사하고 저녁쌀도 없는 형편이라 부인은 마음이 몹시 괴롭고 걱정한 나머지 백결선생을 보고 말을 한다.

“남들은 모두 떡을 찧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으니 어떻게 설을 지내며, 어찌 살란 말이요?”

하면서 걱정하였다.

백결선생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히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다 명이 있는 것이고, 부귀도 하늘이 주는 것이요, 상심할 것이 어디 있소. 내 당신을 위하여 떡 찧는 절구소리를 지어서 위로해 드리리다.”

하면서 거문고로 절구소리를 지어 탔다고 하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거문고를 잘 탄 예술가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

 한 평생을 예술에 몸을 바쳐 청빈한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참고 자료

○ 박제상(朴堤上 서기363-419) : 박 제상(朴堤上)은 신라 19대 눌지왕 때 사람으로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눌지왕의 두 아우를 기지를 발휘해 구하고 순국한 충신이다. 그의 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 박 문량(朴文良)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박 제상은 시조 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破娑王)의 현손(5세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영해(寧海)이며 호는 관설당이다. 박제상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미추왕(味鄒王 261∼284)의 동생인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 내물왕(奈勿王 356∼402)이며, 내물왕의 동생이 실성왕(實聖王 402∼417)으로, 내물왕의 아들들이 어리므로 강압적으로 왕이 되었는데, 내물왕의 장자 눌지(訥祗)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녀 실성왕이 도외로 치고, 둘째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셋째 미사흔(未斯欣)은 왜(倭)로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 박제상이 주축이 되어 신 자천(申自天), 배 중량(裵仲良) 등과 실성왕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실성왕이 눌지왕(訥祗王 417∼458)에게 양위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일본에 억류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박 제상이 고구려로 가서 “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 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그 노래가 유명한 『우식곡(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 제상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오.”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 하겠다.”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나는 계림의 신하다.”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 철복(金轍復)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 하였다. 또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 딸 “아기(阿奇)”와 셋째 딸 “아경(阿慶)”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보게 하였던 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차녀 “아영(阿榮)”은 가정을 위하여 굳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 남동생이 바로 백결선생(百結先生)이다. 눌지왕이 듣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고 위로 하였다. 이러한 박 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하였고, 정조(正祖)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백결선생(=朴 文良)은 박 제상의 아들이다 :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명신(名臣)인 문량(文良)은 제상의 아들로 천성(天性)이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淸貧)하게 살았으며 거문고를 즐겼고, 의복(衣服)이 남루하여 백 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이로 인하여 호(號)를 백결(百結)이라고 하고, 이름을 고쳐 누랑(婁琅)이라 하였다. 478년(자비왕 21) 그가 65세 때 이벌찬의 벼슬에 올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개탄하여 천재(天災)·치폐(治弊)·처경(處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 등 여섯 장(章)의 상소문(上疎文)을 올리니 이 상소문은 너무도 유명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하자 그의 부인이 “남들은 곡식이 풍부하여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당장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어찌할꼬?”하며 탄식하자 그는 태연하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것이니 오게 되면 받는 것이요, 가게 되면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부인은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오?”하며 거문고를 당겨 방아소리를 구성지게 내어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방아타령은 『우식곡(憂息曲)』을 대신하여 서라벌에 온통 퍼져 즐겨 불렀다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거문고로 회포를 푸니 이것을 『낙천악(樂天樂)』이라 하였다. 문량은 말년에 세상일을 버리고 거문고에 전념하며 선세(先世)의 도(道)를 행하다가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백결선생이 조용히 숨어 살던 곳이 충효곡(忠孝谷)이고, 세칭 물금리(勿禁里)이다. 백결선생의 증손이 마령간(麻靈干)인데, 선도산(仙桃山)에서 김유신(595∼673)과 김춘추(604∼661)의 스승이 되어 백결선생의 도(道)를 행하였다. 신라불교 순교자인 이차돈(異次頓)의 목을 베게 하여 불도(佛徒)를 해체시킨 사람도 마령간이다.

부도지의 내용을 율과 려, 음과 성, 음상과 향상, 5음 7조의 율려 등으로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 부도지는 방아타령의 대악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 지어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아버지 박 제상의 이름으로 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 414∼?) :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 박 문량은 신라 실성왕 13년에 양산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에서 아버지 충렬공 박 제상(忠烈公 朴堤上)과 어머니 국대부인(國大夫人) 사이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결선생의 어렸을 때 이름은 효원(孝元)이고, 백결(百結)은 그의 호이다.

신라 눌지왕 때 아버지 박 제상은 “내 계림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왜국에서 충절을 지키다 순국하였고, 어머니 국대부인은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박제상을 기다리다 누나 아기, 아경과 함께 자진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는데, 당시 백결선생의 나이는 5세였고 이후부터 둘째누이 “아영(阿榮)”에게 길러졌다.

훗날 누이 “아영”은 눌지마립간의 아우인 왕자 미사흔의 부인이 되었고, 백결선생도 궁궐생활을 하면서 장성하여 각간(角干) 이 수현(李壽玄)의 딸과 결혼하였고, 자비왕 때 이작찬예부시랑(伊勺飡禮部侍郞)에서 대령군(大寧君)으로 책봉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빈하게 살았는데, 가난하여 옷을 백번이나 기워 입어 마치 메추라기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너덜너덜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 의해 동쪽마을의 백결선생이라 불리어졌고, 선생 또한 일찍이 공자가 찬탄한 중국의 영계기(榮啓期, 중국 춘추시대 사람으로 물질에 구애됨이 없이 유유자적한 삶을 누림)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쁨과 성냄, 슬픔과 즐거움 등 희로애락을 모두 거문고 가락에 실어 마음을 달랬다.

백결선생은 65세 되던 해(자비왕 21년, 478년)에 신라 17관등 중에서 첫째인 이벌찬(伊伐飡)을 제수 받아 벼슬길에 올랐으나 조정에 아첨하는 무리가 많음을 보고 천재(天災)·치폐(治弊)·처경(處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 등 여섯 장(章)의 상소문(上疎文)을 올리고 개탄하였다.

상소문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빽빽한 숲속에 나무가 있으면 묶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고, 빽빽한 가시덤불 속에 난초가 있으면 베지 않아도 저절로 시든다.”고 하여 나라의 인재등용 적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했다.

이러한 백결선생의 충성스러운 상소문을 두고 운월재 신 문정(雲月齋 申文貞)은 “선생께서 인군을 깨우친 바는 고인들의 이른바 선간·선소한 자도 선생과 짝할 자가 없나니 만세를 통하여 인군 된 자는 마땅히 이를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고, 또 “영웅호걸은 김 유신(金庾信)을 따를 이가 없고 공명정대는 김 양(金陽, 신라 대각간)만한 자가 없으나, 백결선생은 양자를 겸한 분이다.”라고 칭송하였다.

백결선생은 방아타령을 지어 그 아내를 위로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데,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동네 사방에서 떡방아 절구 소리가 들려오니 백결선생의 부인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방아질을 하는데 우리만이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길까?”하고 걱정하였다.

이에 백결선생이 답하기를 “무릇 사생(死生)은 목숨에 있고,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인 것이다.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데, 부인은 어찌 이를 상심하시오? 내 그대를 위하여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슬픔을 위로해 주리다.”하였다.

이에 백결선생이 거문고를 뜯어 떡방아 소리를 내니 그것이 세상에 전해졌고, 그 곡조를 『대악(碓樂, 방아타령)』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곡조의 원형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에 기록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상저가(相杵歌)』라는 이름으로 작자 미상의 방아타령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듥긔둥 방해나 디히 히얘 -(덜커덩 방아나 찧어, 히얘)

게우즌 바비나 지저 히얘 -(거친 밥이나 지어서, 히얘)

아버님 어머님끠 받잡고 히야해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옵고, 히야해)

남거시든 내 머고리 히야해 히야해-(남거든 내가 먹으리라, 히야해 히야해)

백결선생은 또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거문고로 회포를 풀어『낙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고, 낙향 후에는 아버지 박 제상이 지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징심록(澄心錄)』17지(誌)중 『금척지(金尺誌)』를 지어 첨철 하였으나 오늘날 금척지를 비롯한 징심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17지중의 하나인 『부도지(符都誌)』가 후손들이 기억을 되살려 편찬되어 소개되고 있다.

※ 금척(金尺) : 단군임금이 천부경의 묘리를 체득하여 만든 황금자로 만물 태생과 형성의 도량형으로 추측됨.

백결선생은 자작시 한편을 전하고 있다.

 

하늘이 사람을 내었으니 모든 것이 하늘에 매었노라.

임금을 잃고 또 얻음이 그 역 하늘이 할 일이로다.

얻거나 잃거나가 모두가 한갓 나를 위함이 아니려니,

오거나 가거나를 탓하여 무엇 하리.

세상에 별한 낙 없나니, 한갓 내 천명을 따르리라.

 

한편 백결선생은 선대조 선양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나라로 부터 받은 봉록은 선열의 유덕으로 얻은 것이라 하여 봉록 모두를 선산에 모셔진 선조들의 봉분을 가다듬는데 사용했다.

이처럼 백결선생은 곤궁한 처지에서도 청빈한 생활과 더불어 참된 즐거움을 가져 후인들이 백결학사를 세워 그의 유풍을 전했고, 백결선생의 자손인 마령간(麻靈干)은 선도산(仙桃山)에서 신라 김유신(595∼673)과 김춘추(604∼661)의 스승이 되어 백결선생의 도(道)를 행하였다.

나라에서는 1946년 양산 상북면 소토리 백결선생의 생가 터에 효충사(孝忠祠)를 건립하여 아버지 박 제상과 함께 제향 하였고, 효충사는 1988년 양산향교 전교를 역임한 안 종석 선생이 사재를 희사하여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효충사 : 신라 충신 충렬공 박 제상과 그의 아들 백결(文良)선생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효충사는 1988년 경상남도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태생부터 부모를 잃은 슬픔과 정세의 곤란 속에서도 거문고를 사랑하고 세상을 풍자한 백결선생은 청렴한 사상과 지극한 충효의 정신으로 고금의 역사 속에서 비할 만한 사람이 없고, 오늘날 백결선생이 남겨 놓은 자취와 운치로 인하여 대한민국을 빛내고 있는 고장 양산의 자랑스러운 위인이다. 󰃁

(푸른 숲. 2012.11.20.)

※ 유의사항 : 상식적으로 충신 박 제상의 아들로 박 문량〔文良, 어렸을 때는 효원(孝元), 개명하여 누랑(婁琅)이라고도 함.〕이고, 호가 백결(百結)인데 일반적으로 백결선생과 박 제상의 관계를 잘 밝히려 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도덕책에 나온 “방아 타령하는 백결선생”만 나오지 “충신 박 제상의 아들”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상하다?

앞으로 이에 대하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전문자료에는 나오는데 일반인이 알지 못하도록 차단되어 있다.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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