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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의 신라 천년의 전설

[스크랩] 신라 천년의 전설(3)경주이씨 시조와 표암

ʊ이야기와 도시(n) - 新羅千年의 傳說

 

3. 경주이씨 시조와 표암(瓢巖)

푸른 숲

cheonglim03@hanmail.net

 

 경주이씨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 온 옛터라고 하는 표암(瓢巖)은 경북 경주시에서 동북으로 약 2km 소금강산 남쪽 논호림(論虎林)으로부터 동으로 동천동에 있다. 이곳에는 비각을 세우고 제장(祭場)까지 만들어 놓아 경주이씨 문중에서 신성시하고 있는 곳이라 이 암산(巖山)을 표암이라 함에는 세 가지 전설이 돌고 있다.

 첫째,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村長)인 이 알평(李謁平) 공(公)의 강탄지(降誕地)라고 전하여 오는 데, 약 150여 년 전에 비석(碑石)을 세웠고 평지의 건물은 근년에 세운 것이다.

 둘째, 바위가 드러남은 서울에 해를 끼친다하여 표주박을 심었더니 그 잎이 퍼지면서 바위를 덮었다는 말이 있다.

 셋째, 다음은 표공(瓢公)이 동해에서 건너 올 적에 허리에 찬 표주박을 이곳에서 풀었다 하는데, 이 표공은 박 혁거세(朴赫居世)왕(王)을 도와 나라의 기초를 세운 지혜와 용맹을 겸한 장부였다고 한다. 또 단기 2315년(BC.18) 표공이 마한(馬韓)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마한 왕이 표공에게,

“너의 나라는 원래 우리나라 속국인데 어찌하여 공물(貢物)을 보내지 아니 하느냐? 너희 놈들은 예의를 모름이 심하니 이후에 만약 반성하지 못하면 그대로 두지를 않을 것이다.”

수십 명의 병졸이 좌우로 늘어 선 가운데 위엄 있는 호통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쯤으로 겁을 낼 표공이 아니었다. 이에 표공이 미소를 띠며,

“우리 서라벌의 임금님은 하늘이 도와 나라를 이룩하셨으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나라 일에 힘쓰시어 먼 나라일지라도 모두 우러러 볼 따름입니다. 그러하되 거절함이 없이 옛 정의(情誼)를 지키어 우리 사신을 보냈거늘 도리어 신을 대함이 이다지도 무례(無禮) 하시오! 위협을 가한다고 두려워 굽힐 자 서라벌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이와 같이 늠름한 태도로 답변을 하였다. 마한 왕은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조우 대신(大臣)들의 말림으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표공이 다녀 온 후로 마한(馬韓)은 신라(新羅)를 모욕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 용맹하고 지혜가 많은 표공이 경주이씨의 시조(始祖)가 된 바로 이 알평(李謁平) 공(公)이다.

 

참고 자료

○ 慶州李氏 시조 알평(謁平) 유허지 /http://blog.daum.net/seonsang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는 이 알평(李謁平)으로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 대종보(大宗譜) 상계편에 박혁거세(朴赫居世) 때 아찬(阿粲)에 올랐고, 32년(유리왕 9)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536년(법흥왕 23)에 문선공(文宣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무열왕 3)에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대(繼代)를 실전하여 목은(牧隱) 이 색(李穡)이 익재(益齋) 이 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 거명(李居明)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가 되었다. 우리나라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한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경주이씨 이 알평 공의 후손에서 분관한 것이다.

이알평의 후손에서 이 위(李渭)의 차성이씨(車城李氏)와 이 개(李開)의 합천이씨(陜川李氏)가 갈라졌다. 중조인 이 거명의 후손에서는 5세손 이 주좌(李周佐)가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 우칭(李禹偁)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이 양식(李陽植)이 우계이씨(羽溪李氏)로, 17세손 이 영재(李永梓)와 이 군재(李君梓)가 진주이씨(晉州李氏)로, 22세손 이 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나뉘었다. 󰃁

(푸른 숲. 2012.11.21.)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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