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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2/4다마 계룡산

(엽서수필 2) 116. 자문자답

 

“40년 만에 다시 오른 마을뒷산 계룡산”

116. 자문자답

이영백

 

 나는 무종교다. 그러나 어려서 엄마 따라 절에 자주 갔다. 그렇다고 종교가 “불교”인 것은 아니다. 다만 통달의 원리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종교적 설파방법을 이용할 뿐이다. 티베트에서 스님이 되고자 공부하는 방법이 있다. 즉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배워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하여 해탈의 경지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마치 옛날 서당식 문리(文理)틔우기 방법과 일치하는 것 같다.

 나는 무엇에 통했기에 자문자답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겠는가? 남을 가르치는 방법을 배웠기에 알고 있는 이론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라”가르칠 뿐이다.

 수필 쓰는 것을 자신의 일상 드러냄에 불안하거나 공개가 어려우면 함부로 쓰지 말라. 그러면 해소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쓸 것인가? 자기가 정한 주제에 사유(思惟)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결코 쉽지가 않은데 자기 일상을 드러내는 방법을 부단히 글로 표현한 후에라야 그것이 통했다고 할 것이다. 이때만이 겨우 사유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날개도 없으면서 날려고 하다가는 그만 쉽게 땅에 떨어져 다칠 일 뿐이다.

 수필은 자기 수양이며, 결코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두드러지게 드러냄이 아닐 것이다. 수필의 특성에 따라 묘사나 표현의 구사력이 수채화처럼 순수하게 넘어가는 문장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문장쓰기에 노력을 강화하여야 수채화 같은 한 편의 명품수필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자문자답하라. 자기가 주제(글제)를 정하고, 자기가 소재를 선택하여 이야기 꺼리인 화소를 적당하게 문단으로 구성하라. 그 맥이 부드럽고 수채화 그리듯 이어가야 위트가 생기고, 유머로 만나고 사람들이 그 유혹에 빠져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것을 뒤집는 반전이야 말로 글 읽는 독자들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마침내 결론에 이르면 서두에서 유혹하고 반복하듯 다른 결과로 독자들이 한 울음이 나오는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이라야 한다. 이러한 글이 좋은 명품의 수필이 될 것이다. 그것도 짧은 수필인 “엽서수필”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자신만의 꿍꿍이속이 아닌 자문자답으로 한 편의 수채화처럼 그려라.

(20210214.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