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엽서수필 2/4다마 계룡산

(엽서수필 2) 115. 엽서수필의 답변

“40년 만에 다시 오른 마을뒷산 계룡산”

115. 엽서수필의 답변

이영백

 

 수필이 나를 말한다. “엽서수필”씀이 말한다. 비록 짧은 수필이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세상으로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자꾸 장르로 굳히어 간다. 짧은 수필인 엽서수필을 계속 쓰고 있다. 지금도 엽서수필을 쓴다.

 글을 쓴다. 수필을 쓴다. 짧은 수필인 엽서수필을 쓴다. 누가 묻는다. “왜 그렇게 내일 죽을 것처럼 글을 써 대는가?”라고. 그렇다 글을 쓰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손목과 팔을 아파하면서도 글 쓴다. 글은 곧 나의 분신이다. 내가 사회에 뒹굴고 살아왔던 궁색한 삶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곤충이 제 허물 벗듯 그 흔적을 남기고 싶기 때문에 글을 쓴다. 또 글을 쓰면 재미나다. 그 기억으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글로 남기는 것이다. 비록 개인이 겪은 역사이겠지만.

 물론 줄글에 한하지만 글을 풀어내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 부른다. 나는 작가(作家)인가? 그렇다. 글을 지으면 작가라 할 것이다. 마치 작가의 빙의처럼 안 쓰면 아파온다. 써도 아파온다. 차라리 쓰고 아파하고 아리어 하자. 그래야만이 작가가 될 수 있다. 의자에서 궁둥이를 떼지 말고 오랫동안 참고 글을 써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 가벼이 궁둥이를 떼면 작가의 질감이 떨어진다. 하나의 문장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더욱 고뇌에 찬 고민과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으로, 어휘선택으로 글을 짓는다.

 글만 쓴다고 작가가 되는가? 작가의 고된 자기훈련으로 사고를 확장하고, 구성감각을 확대하여야 한다. 손가락 아픔은 육체적이지만 머릿속 사유(思惟)는 껍질을 째고 흘리는 붉은 피다. 그렇게 엽서수필 장르를 개발하는 시금석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짧은 수필”이라는 관형적 표현보다 “엽서수필”이라는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멋있어 보아 그렇게 하였다. 한 장의 엽서(葉書)처럼“엽서수필”이라 명명한 것이다.

 엽서수필은 삶에서 체험하고 체득한 교양과 지식으로 깍두기를 버무리듯 얽어내는 고된 창작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엽서수필에는 “엽서”가 없다.

 엽서수필을 이제 두 권의 책으로 거뜬히 짓고 보니 엽서수필을 장르로 주창하길 잘 했다고 본다. 후일 문예사조에 수필장르 중 “엽서수필”이라고 누가 최초로 명명했느냐고 물으면 이름 석 자 남기는 것이 답변이다.

(20210213. 토. 엄마 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