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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2/4다마 계룡산

(엽서수필 2) 112. 얇은 지갑 열다

40년 만에 시 오른 을뒷산 계룡산

112. 얇은 지갑 열다

이영백

 

 나는 남자다. 봉급을 받고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다달이 세금과 공제금을 제외하고는 현금으로 갖다 주었다. 그 돈은 살림살이 하는데 쓰이는 돈으로 지급하며, 남은 돈은 목돈으로 저축하였다. 지금도 생활비를 현금으로 찾아다 직접 손에다 쥐어준다. 남성은 평생 샐러리맨이다. 남성은 돈 벌고, 여성은 돈 쓰면 된다. 이체하지 않고 현금 찾아주는 재미로 산다.

 “지갑이 얇다.”함은 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은어(隱語)이기도 하다. 남성이 외출하려면 지갑에 현금을 넣고 다녀야 친구를 만나도 쫄지 않는다. 요즘은 현금 없이도 카드만 소지하기에 괜찮겠지만 과거에는 현금이 없으면 정말 난처하기에 늘 현금을 조금 넣어 다녀야 마음이 든든하였다.

 “지갑(紙匣)은 돈이다”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본래 지갑은 가죽이나 비닐, 헝겊 따위로 자그마하게 만든 물건에 불과하다. 그것이 은어로 쓰이면서 곧잘 잘 산다, 못 산다는 기준이 되는 경제규모를 말하기도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지갑이라는 어휘의 위상이 그 만큼 올라갔다.

 어디 모임에 가면 곧잘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지갑 열어라”고 요구한다. 곧 “돈을 좀 써라.”는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곧잘 지갑의 사정이 원활하지 못하지만 카드를 끄집어내어 밥값이나 술값을 그어댄다. 그리고 내었다고 하는데 잘 알아주지도 않을 때는 좀 섭섭하였다. 그래도 지갑을 열고나면 그렇게 마음이 저절로 행복하였다. 그 행복이 나의 카타르시스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또 다음에도 열일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 얇은 지갑의 주인공이다. 어떨 때는 빈 지갑으로 다닌다. 결과적으로 지갑은 얇지만 이제는 카드로 잘 그어댄다. 월말 카드사용량이 합계되어 도착하면 다만 쓰리고 아플 뿐이다. 그러나 내가 카드를 사용하여야 모두가 좋아하는데 어찌 그냥 갈 것인가? 다음 달에도 그어 대야지. 지갑을 열어야 모두들 좋아하니까 비록 그것이 얇은 지갑일지라도.

 사실 남자는 돈을 벌지만 올바르게 써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비록 얇은 지갑이지만 자주 열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 한평생 좋은 사람으로 낙인찍어 줄 것이다. 그래서 종교처럼 믿고 돈을 쓴다. 지갑 연다.

 돈은 남자는 벌고, 여성이 쓰면 즐겁다. 남성은 그래서 지갑이 얇다.

(20210207.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