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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

[스크랩] (푸른 숲 제7 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42.타이빼이에서

신작수필

42. 타이뻬이(臺北)에서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1995년 겨울 마지막 12월에 동남아 순방에서 자매대학이 있는 타이완(臺灣) 타이빼이(大北)로 날아갔다. 사실 일정은 홍콩-싱가폴-대만으로 경유하는 일정의 연수에 참가하였다. 마지막 연수지인 타이빼이산업대학(大北産業大學)으로 자매대학을 방문하였다.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치고 오늘 산업시찰 일정을 점검하였다.

 먼저, 대만의 장개석(蔣介石)총통기념관의 교대식 열병을 보기위해 정확히 12시에 시간을 맞춰야 하고, 고궁박물관은 넉넉한 시간을 얻어서 구경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싱가폴에서 홍콩을 경유하여 대만 타이빼이공항에 기착할 때의 그 감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만기후는 겨울에 습도가 높아 그 체감온도가 대단하였다. 대만 영상10도가 우리 체감 온도는 영하 30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이드가 설명하였다.

 공항 하늘에서 내려다 본 타이빼이는 온통 도시가 잿빛이었다. 이 모두가 기후 탓이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 도료를 칠하여 두어도 해양성 기후에 습도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만 사람들은 아예 건물 외벽에 칠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여 이 도시 전체 분위기가 잿빛으로 변하고 만 것이라고 한다.

 장개석총통의 기념관은 동서남북 네 곳에 모두 문이 있어서 길을 잊어 버려도 어디 한 곳에만 가만히 있으면 찾을 수 있다고 가이드가 강조하였다. 기념관은 이층으로 볼거리도 있었고, 경비교대식을 신기하게 참관하였다.

 자유 시간을 10분 갖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모두들 우리 버스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런데 영어교수 한 분이 그만 길을 잃어 가이드가 찾아가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마음이 급해서 혼자 자꾸 찾아다녔다. 가이드 찾아다니니 서로 어긋나면서 만나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자꾸 돌아 다녀 두 시간이나 허비하고 말았다.

 두 시간을 잃어버리고, 늦게 점심을 먹고서 고궁박물관으로 갔다. 고궁 박물관에는 장개석이 본토에서 피난 올 때 트럭으로 싣고 온 중국의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트럭을 공격하자고 하니 모택동이 유물은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서 그대로 타이완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물이 하도 많아서 순회이동 전시하는 데도 끝이 없다고 한다.

 가이드의 두 시간 반 동안이나 일화를 설명하고, 유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잘 흘러갔다. 갑자기 60대 이상인 교수 두 분이 그만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따뜻한 차 한 잔씩으로 목을 축이고 쉬게 하였다.

 고궁박물관을 나와서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라고 해서 타이완 최고 요리 집으로 안내 되었다. 여러 가지 고기가 진열되어 있어서 그것을 선택하고, 그릇에 담아오면 대형 솥뚜껑을 뒤집어서 선택한 고기를 일단 익혀 그릇에 담아 준다. 각자가 가지고 와서 신선로에다 자기가 먹을 만치 넣어 밥과 함께 먹는 방법이었다. 낮의 피곤함도 중국 술 곡주(穀酒)를 마셔가며 저녁을 먹었다. 숙소인 통일대반점(統一大飯店, 프레지던트호텔)으로 돌아왔다.

 외국에서는 밤거리를 함부로 다닐 수가 없었다. 며칠간 집에 전화를 넣지 못했는데, 슈퍼에 들러 전화카드를 샀다. 전화카드를 공중전화 통에 넣을 때는 탁탁 쳐 넣어야 했다. 통화가 끝나면 그대로 튀어 나왔다.

 나와 같이 간 직원과 함께 둘이서 타이빼이 밤거리를 걸었다. 일부 교수들은 게이가 나온다는 술집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거리 간판 중에 유별나게 많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발청(理髮廳)”이라는 간판이었다. 사실 이발은 안 하고, 그곳은 안마소 이었다. 말은 안통하고, 손짓 발짓으로 겨우 무릎에서 목까지 안마가 미국 달러로 30달러이고, 무릎에서 발까지는 10달러이었다. 무릎에서 목까지는 아가씨가. 무릎에서 발까지는 남자가 안마를 하여 주었다. 사실 무릎에서 목까지 안마는 허탕이었다. 안마를 옳게 하지 못하였다. 그저 아가씨가 물컹물컹 만지고만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하는 무릎에서 발까지는 10달러만치 톡톡히 잘 해 주었다.

 공연히 40달러만 버렸다. 이발청을 나와 타이빼이 밤거리를 그냥 걸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가는데 어찌 알아듣고서는 우리를 불러 세웠다.

“여보세요, 한국 사람들?”

“그렇습니다.”

“남한사람? 북한사람?”

“예.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반가. 나도 서울에서 30년 전에 살다가 온 사람. 맥주 한 잔 해.”

 여기서 우리말이 잘 통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 맥주라도 한 잔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지하로 따라 들어갔다.

 여러 가지를 많이 시키라는 것을 거절하고, 맥주 3병에 마른안주 하나를 선택하여 대만 돈 3,000원을 주었다.

 실제 대화를 해 보니 고국을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잊어버린 말이 많아서 어눌한 50대 고향이 서울이었던 아주머니이었다. 더 시켜 먹으라는 말을 뒤로 한 채 우리는 그만 나와 버렸다.

 같이 간 직원이 대만 슈퍼에 대뜸 들어가서, 캔 맥주 7통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대만 돈을 가지고 나와 이런 것을 달라고 한다. 달러 밖에 없다고 하니까, 자기들 돈으로 달러로 환산한다. 1캔에 2달러, 모두 14달러를 주었다. 호텔에서는 1캔이 7달러인데 슈퍼에서는 이렇게 쌌다.

 대만 타이빼이에서 통일대반점으로 돌아와 두 사람은 캔 맥주 파티를 하였다. 대만 푸른 밤에 고향을 생각하면서 캔 맥주 파티를 하고 날을 샜다. 󰃁

(푸른 숲/20100-20130513.)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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