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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

[스크랩] (푸른 숲 제7 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15.묵유

신작수필

15. 묵유(黙諭)*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N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공휴일을 여러 번 겪었다. 공휴일은 교사 생활에서 휴식이요,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또 다른 생활이다. 산골에 근무하면서 공휴일은 어떻게 보내면 좋은가. 공휴일이지만, 교사는 당직인 일·숙직 부담이 항상 따라 다닌다.

 H선생은 이곳이 고향이었다. H선생도 시골에서 자라면서 서당을 다녔다고 한다. 제 때에 학교를 가지 못해서 동기간에 나이차이가 났고, 자격도 준교사에서 시작하여 봉급날에 못내 미안하였다. 호봉차이가 나서 금액이 많이 적었다. 그러나 준교사 자격으로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누구보다 대단하였다.

 나도 서당에 다니고, 2년이나 동기간에 차이가 나는 것을 알고서는 수시로 술도 같이 한 잔 하면서 가까이 지냈다. 마침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물론 공휴일이다. H선생도 별다른 일이 없는 한가한 날인 모양이었다.

“이 선생님! 오늘 바쁩니까?”

“아닙니다.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아니, 오늘 도랑에 물고기나 잡아서 술안주나 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누가 술 한 잔 하자는 사람 없는가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라 이런 횡재(?)가 어디 있나 싶어 얼른 대답하고 말았다. 시골 집 앞에 도랑물에서 모기장으로 고기를 잡던 실력(?)도 있다. 그런대도 아무도 아직까지 고기를 잡자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나올까요?”

“우리 집에 그물은 있고, 바께쓰 한 개만 들고 오이소.”

“그러지요.”

 얼른 집에 가서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큰 아들과 함께 바께쓰를 들고 나들이를 나섰다. 내자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앞에 H선생과 고기 잡으러 가려고…….”

“예, 많이 잡아 오이소.”

 아무 생각 없이 모처럼의 공휴일에 그것도 아들과 함께 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괴이치 아니 하였다. 나는 황급히 바께쓰 하나 달랑 들고 고기 잡으러 나섰다.

 집 앞에 도랑물이 있고, 이제는 초여름이 시작되어 제법 물이 졸졸 흘러 내려가고 있다. 도랑에는 온갖 잡초가 있고, 그 동안 센 물살이 흘러 잡초들이 휩쓸려서 고부라져 있다. 덩달아 시커먼 참개구리들이 멋들어지게 헤엄을 친다. 물살이 거의 없는 연못 같은 수면 위로는 소금쟁이가 활보하고 나처럼 해 봐라, 나 잡아 봐라하는 것처럼 둥근 물결 원을 그리며 뽐내기도 한다. 굽이쳐 흘러내리는 작은 도랑물에서 도랑의 높낮이로 인하여 대자연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도 한다.

 나와 H선생은 무슨 큰일이라도 낼 기세로 허연 다리가 나오도록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고, 도랑물에 들어갔다. 첨벙 소리 좋게 작은 그물을 던졌다.

“보이소! 빨리 이리로 바께쓰 가져 오이소!”

“예, 예. 가져갑니다.”

 한번 친 그물에 잡혀 올라오는 종류가 부지기수다. 송어, 붕어, 미꾸라지, 점박이, 이름 모를 벌레들, 소금쟁이, 물 방게 등 먹는 것, 먹지 못하는 것들이 수초와 함께 잡혀 온 것들이다.

겨우 송어, 붕어, 미꾸라지를 바께쓰에 골라 넣는 순간에 또 그물을 올려 연속으로 고기를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동네 꼬맹이들과 우리 아들이 졸졸 따라 다니면서 잡혀 오는 고기를 보고 탄성을 지른다.

 도랑물을 따라 고기를 잡아 내려가다 보니 어느 덧 교문을 지나 큰 웅덩이까지 오게 되었다. 여기서는 하구언을 만들어 두었기에 물이 많이 고여 있고, 더 많으면 넘쳐흘러 나가는 곳이었다. 열심히 그물 들리어 올라오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내가 든 바께쓰 무게도 자꾸 무게를 더 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잡혀 온 물고기 중에 약한 놈은 벌써 배때기를 뒤집어 허옇게 누워 있고, 그래도 힘이 센 물고기는 바께쓰 속이 좁다고 물장구를 친다. 덩달아 섞여 들어 온 소금쟁이가 자기 연못인 줄 알고 원을 그린다.

H선생도 그물을 자꾸 걷어 올리다 보니 무척 더운가 보다.

“이선생! 이 잡어를 가지고 솥구려서 안주해 먹은 적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앞에도 도랑물이 있어서 봄부터 여름 내내 잡아서 아버지 새참 안주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나도 농촌 출신이고, 그런 경험은 다 해 봤습니다.”

“하하하. 정말 그런 경험도 했군요. 아이고! 덥다. 물에나 한 번 들어갔다 나와야지!”

이제껏 물에서 고기를 잡던 분이 그물을 팽개치고는 고인 깊은 물속으로 금방 뛰어 들고 말았다. 몸무게만치 첨 버덩∼소리도 비례했다.

“아이고! 시원하다!”

 신체가 좀 크신 분이 연못처럼 된 도랑물에 옷 입은 채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있다.

 이것이다. 시골에 사는 참맛이다. 시골문화다. 고기를 잡고, 더우면 물에 뛰어 들고, 푸른 들판 속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자연을 벗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봉록(俸祿)이 나오고 켜켜이 교사의 경험이 쌓여 가고 있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말‘낭만에 대하여’만끽하고 살아간다. 도랑의 물고기도 제가 살 권리가 있고, 또한 우리가 잡아서 안주할 권리(?)도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첫 경험을 해 보는 것이다.

 시골의 정취에 취해 본다. 저 하늘 높이 흰 뭉게구름은 인간은 왜 사나라는 화두(話頭)를 던져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잊고 살았던 듯 오늘은 며칠이지? 무슨 날이지? 음력 사월 초파일이다. 누가 그랬던가? 고통은 깨달음을 낳고, 깨달음은 그 속에 빠지고, 이별 속에 사랑을 알고, 사랑은 외로움 속에 빠지고, 죽음이 삶의 스승이라고 하니 이 또한 본래 무(無)인 것을 탐 진티에 찌든 중생이 보시의 마음으로 공덕 쌓으니 불성이 티 없이 맑아서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삿된 마음까지 버렸으니 이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이것이 바로 해탈(解脫)의 경지라 했던가?

 잠깐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제법 몰이해성의 종교에 들어가 본다. 나는 절실한 종교인도 아니요, 종교에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다. 왜 하필 우리 둘은 그 많은 공휴일 중에 부처님 오신 날에 방생은 하지 못할지라도 고기를 잡고 있다니 말이다. 괴이하다. 참말로 괴이하다. 스스로 섶을 짊어지고 불구덩이에 뛰어 들다니?

 이런 저런 생각사이에 포항-구평간 시내버스가 지나가면서 고기 잡는 두 사람, 아니 우리에게 마치 우리에게 나쁜 놈들 먼지나 어디 실컷 덮어 써 봐라 하듯이 진한 먼지를 먹이고 휑하니 달아난다. 어쩜 오늘 잡은 이 고기를 먹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둘은 먼지를 덮어쓰자말자 순간 해탈을 하였는지 모른다. 원효스님께서 해골바가지 물 먹은 것처럼 우리가 진짜 해탈을 한 것인가?

“H선생! 오늘 못할 짓 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잖습니까? 우리가 방생은 못할지언정 하필이면 오늘 물고기를 잡다니?”

“딴은 그렇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두를 돌려보내 주고 빌고 또 빕시다.”

“그래야 하겠습니다. 나 원 참!”

“어쩔 수 없습니다. 저 위에 살던 고기 잡아다가 이 아래 물 많은 곳에 놓아 줍시다. 이것 또한 부처님 오신 날의 참 방생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우리가 언제 방생을 따로 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그래 고기야! 오늘 참 미안 하게 됐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잘 살아가거라!”

 우리 둘은 아침에 시작할 때 그 기세는 모두 사라지고 어느 샌가 비운 마음으로 해서 다시 하늘의 흰 뭉게구름은 어느 샌가 오색구름으로 빛나고 있었다.

 깊은 물에 쏟아 버리자 흰 배때기가 보이던 물고기가 어느 샌가 깊은 좋은 물에 생명을 건졌는지 활기차게 헤엄을 치고 있다. 이것 또한 방생이 아니던가. 공당의 푸른 하늘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이 좋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다.

 잡은 고기 모두 놓아주고, 공판장에 들러 35도 십은 소주 사 들고 우리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김치조각으로 소주 마신다. 내자는 고기 잡아 어쨌느냐고 하는데 둘은 꿀 먹은 사람 되어 묵언(黙言)으로 해탈 하였다. 󰃁

(푸른 숲/20100-201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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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유(黙諭) : 말없이 가르침.

묵(黙)-말 없을 묵, 유(諭)-깨우칠 유.

출처 : 푸른 숲/20100
글쓴이 : 62seons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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